고즈넉한 온천 마을 유후인으로
11월, 날이 선선해지고 밤이 길어지니 귀신같이 가을을 타기 시작했다. 심란한 마음에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지만 새로운 정보를 찾아 소화할 여유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별 계획 없이도 무난히 즐길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내내 고민하던 어느 날, 오후 일정을 마치고 덕배랑 참치를 먹으면서 후쿠오카 이야기를 했다. 크게 화려하진 않지만 여유롭게 먹고 놀기에는 괜찮은 곳이라고, 마침 엔저가 겹쳐 쇼핑하기도 좋다더라고.
비행시간이 짧은 것도 아주 마음에 들어 그날 바로 여행지를 결정했다. 첫 계획은 후쿠오카 시내에만 머물며 먹고 마시는 한량 컨셉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단풍철 료칸이 조금 아쉬워졌다. 아무래도 신선놀이를 외면하기 어려웠던 우리는 결국 유후인에 하루 묵는 일정을 더해 삼박사일 여행 기간을 부지런히 채워보기로 했다.
오전 아홉 시 반, 후쿠오카 공항 입국심사장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하카타 역에서 출발하는 유후인행 버스를 예약하면서 간단히 식사는 하고 넘어가자며 여유시간을 두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겨우 공항을 빠져나와 하카타에 도착해 보니 남은 시간은 단 삼십 분.
하지만 메뉴가 이치란이라면? 한 끼 식사에 삼십 분은 차고도 넘친다. 사실 유후인행 버스는 후쿠오카 공항에서도 탑승할 수 있어 굳이 하카타 역까지 넘어갈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이동을 했던 것은 우리가 지독한 이치란 사랑맨들이었기 때문. 가까운 이치란 지점이 하카타 역에 있었고, 공항에서 그리 멀지도 않으니 겸사겸사 들러보기로 한 것이다. 공항에서의 조급한 마음도 잠시, 좋아하는 메뉴로 뜨끈하게 속을 채우고 기분 좋게 여행을 시작했다.
버스로 두 시간을 달려 유후인 역에 도착했다. 터미널을 나서자마자 하늘을 채우듯 묵직하게 선 유후 산을 보며, 유후인 어디에 있든 저 산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동네 자체는 높은 건물 하나 없이 소박한 느낌이라 참 좋았다. 료칸 체크인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서 우리는 역 근처 코인로커에 캐리어를 넣어두고 근방을 돌아보기로 했다.
초록으로 가득한 시골길을 걸으며 잔뜩 신이 났지만 역시나 면 요리는 소화가 빠른 법. 출출한 기분이 들 때쯤 금상고로케 간판을 발견했다. 갓 튀긴 고로케를 매장 옆 야외 테이블에서 바로 먹어볼 수 있다는데 이걸 어떻게 참느냔 말이지. 기본, 치즈, 고기감자, 게살크림까지 네 개를 사다 반절씩 나눠 먹었다. 산뜻한 바람에 생맥주까지 한 잔 곁들이니 다시 힘이 나서 관광지 특유의 활기로 가득한 플로럴 빌리지를 가로질러 긴린호수로 향했다.
긴린호수는 아침 물안개 핀 풍경으로 유명해서 나도 그 장관을 보겠다며 호수에서 도보 10분 거리의 료칸을 예약해 두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아침에 약한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만일을 대비해 한낮의 호수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생각보다 아담하다 싶은 첫인상을 안고 찬찬히 주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신기하리만치 높고 푸른 하늘과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산의 대비 덕분일까, 마주한 호수 전경은 내내 길에서 본 풍경보다 깊은 색이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펜션의 옛스러움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맑은 호수에 그 모든 것이 반사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부하지만 수채화 같다는 표현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일본은 대도시 위주로 다녔기 때문에 한적한 자연을 접할 기회가 잘 없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지브리 특유의 감성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근사함에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체크인 시간이 가까워졌다. 커다란 잉어가 헤엄치는 호수를 뒤로 한 채 유후인 역으로 돌아온 우리는 료칸에서 보내준 자그마한 밴을 타고 이번 여행의 꽃 콘자쿠앙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