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피취차(去彼取此) -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나는 무슨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것이 내 삶을 의미 있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아침에 일어나 20년 가까이 다니는 직장에 출근을 하고, 새로우면서도 비슷한 일들을 해치워 나가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집으로 돌아옵니다.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하며, 잠시 책을 읽다 보면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에 드는 생활을 반복해 나갑니다. 잠시의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기에는 그 나머지 시간들의 총합이 너무나 크고 지루하게 느껴지고, 그렇다고 일상적인 나머지 시간들에 집중하기에는 어딘가 억울하고 허전한 마음이 듭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보다는 나에게 없는 것을 자꾸 바라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인가 봅니다.
是以 大丈夫 處其厚 不居其薄 (시이 대장부 처기후 불거기박)
이로써 대장부는 그 두터움에 처하고 그 엷음에 거하지 않으며,
處其實 不居其華 (처기실 불거기화)
그 실함에 처하고 그 꽃(말단)에 거하지 않는다.
故 去彼取此 (고 거피취차)
그러므로 저것(말단)을 버리고 이것(도)을 취한다.
— 노자(老子), 『도덕경』 38장 중
노자의 도덕경에는 '거피취차(去彼取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뜻으로 해석되죠. 곧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과 원칙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 규칙과 규범, 가치와 행동양식을 지키며 살아가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규칙과 규범은 필요하겠지만, 가치와 기준이라는 측면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좋은 차, 비싼 집, 높은 지위, 사회적 명망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라고 꿈꾸는 이상과 희망, 성공과 행복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요?
우리는 역사시간에는 과거 선조들이 살아왔던 삶을 배우게 됩니다. 석기시대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하루하루를 생존을 위해 살아갑니다. 농사를 짓고 평생을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불행하고, 우리네 삶은 행복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UN에서 매년 발표하는 국가의 행복지수에서도 높은 순위에 오르지 못하는 건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 1인당 GDP가 높으냐 낮으냐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노자가 말한 저것(彼)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허영심, 남들이 정해 놓은 기준을 입니다. 반대로 이것(此)은 본질이자 실질적인 것이며, 내가 중심이 된 나만의 기준이죠. 삶이란 앞을 보고 뒤를 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의 나를 보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이유, 행복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오늘을 즐겨라, 내일을 너무 믿지 마라.
— 호라티우스, 『송시(Odes)』1.11 중
‘카르페 디엠(Carpe Diem)’, 라틴어로 “오늘을 붙잡아라”는 뜻의 이 말은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가 남긴 시의 한 구절입니다. 당시 로마는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공화정에서 제정을 넘어가는 극심한 정치적 격변기였습니다. 내전과 권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웠고, 사람들의 삶은 불안정하고 내일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대내외적 현실 속에서 호라티우스는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근심하며 망설이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죠.
단순히 오늘 하루를 놀고 즐기자는 한량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이나 걱정에 대한 해방과 안정감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호라티우스의 송시를 전체적으로 보면 절제하고 근검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 더 많습니다. 화려했던 과거나 일어나지 않을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지금 현재의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거나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 카르페 디엠의 정신입니다.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발표했습니다.
“하나의 입자에 대해 위치(x*와 운동량(p)을 동시에 완벽하게 측정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록 운동량은 불확실해지고, 반대로 운동량을 정확히 알수록 위치는 더 모호해진다는 말입니다. 이는 측정 장치의 한계나 기술 부족 때문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그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애초에 완전한 확정성을 전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입자(전자)가 동시에 입자이면서 파동처럼 행동합니다. 우리가 그 입자의 상태를 알아내기 위해 관측하는 순간, 그 입자는 파동이었던 성질을 잃고 입자성질만 드러내게 됩니다. 즉, 관측 자체가 대상의 본래 상태에 영향을 미쳐버립니다.
예를 들어, 어두운 방 안에서 전자 하나의 위치를 보기 위해 빛(광자)을 쏘면, 그 빛이 전자와 충돌하면서 전자의 운동량을 바꿔버리는 것이죠. 관측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이 개입된 사건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 과거와 미래라는 불확실한 밖만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우리의 시선, 관심, 태도가 지금 내가 있는 안, 현실 자체를 바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소설가이자 시인인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데미안』(1919)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혼란한 유럽 사회를 배경으로, 주인공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타인이 만든 도덕과 질서를 떠나,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정신적 성장 소설입니다.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 밝은 세계(부모, 교회, 규율)에서 시작해, 어두운 세계”(거짓말, 죄책감, 욕망)에 끌리며 혼란을 겪습니다. 그리고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데미안(정확히는 자신의 내면)입니다. 데미안은 기존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이라는 틀에 의문을 제기하며,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남이 정한 선과 악에 휘둘리지 말고, 네 안의 소리를 따라가라.”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
데미안과의 만남을 통해 싱클레어는 조금씩 성장해 나아가고, 결국 스스로가 깨달은 가치의 삶에 도달하게 됩니다. 기존의 세계(알)를 깨뜨리고 새로운 자아(새)로 거듭나는 탄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죠.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인상주의 시대를 넘어 상징주의와 원시주의 회화를 연 프랑스의 화가입니다. 증권 중개인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화가로서의 길을 택한 그는 자연, 본능, 내면의 상징을 추구하며 새로운 화풍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원시의 삶을 찾아 지구 반대편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거대한 가로화면에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인생의 각 단계, 출생 → 삶 → 죽음을 암시하는 인물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왼쪽은 아기, 중앙은 젊은 여인을, 오른쪽에는 늘은 여인이 보입니다. 단순한 풍속화의 형식이지만 살에 대한 화가의 철학적 성찰이 담겨있는 작품인 것이죠. 딸을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져 자살을 시도했던 현실과 연결 지어 봤을 때, 자신의 내면에 천착했던 한 작가의 필사적인 모습이 그림에 투영되어 더 깊은 감동을 줍니다..
서양 철학의 큰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현실 너머의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흐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완전한 현실보다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이상을 추구하며, 인간은 그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말하죠. 반면에 동양사상, 특히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철학은 지금, 여기,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거피취차'는 이 본질을 대표하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세분화되는 만큼, 사람들이 느끼는 겉으로 드러나는 기준은 높아져만 갑니다. 그러나 진실로 중요한 것은 삶을 성찰하는 내면의 충실함이자 오늘을 소중히 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화려한 타인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진실된 내 안의 속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나의 명언이 하나로 흐르다.
– 일언일맥(一言一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