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업무를 마친 두오가 길가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평소에는 대리운전 같은 부업들을 하곤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들이 엉켜있었고, 이것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두오는 손에 들고 있는 명함 한 장을 바라봤다. 공허했던 그의 눈가가 서서히 뜨거운 무언가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장 우태우.
명함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두오는 명함 아래쪽에 있는 회사 주소를 핸드폰으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회사는 두오의 집에서 차로 30분이나 걸리는 곳에 있었다. 하지만 두오의 직장에서는 걸어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두오는 착잡해져 가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만날까?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용서를 빌라고 해야 할까? 용서를 빌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용서를 구할까?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용서를 빈다면, 나는 과연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복잡해진 생각에 지친 두오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생각만 해서는 일을 해결할 수 없다. 일단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두오는 핸드폰으로 지도를 켠 채 그 남자의 회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 후 도착한 그의 회사는 건물의 5층과 6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회사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자동차 부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회사인 듯했다. 지금 당장 5층으로 올라가 볼까 생각해 봤지만 그만두었다. 무턱대고 사장을 만나러 왔다고 한들 만나게 해 줄 리가 없다. 그 남자의 핸드폰으로 직접 전화를 건다고 해도, 생판 모르는 사람과 만나줄 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를 쥐어짰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다리에 통증을 느낀 두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회사 반대편에 있는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음료를 주문하고 창가 쪽 자리에 앉자 도로 너머로 아까 그 건물의 출입구가 정면에 보였다. 지금도 몇몇 사람들이 출입구 문으로 드나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회사의 사장인 그 남자 역시 그 출입문으로 드나들 것이다. 남자가 출입문을 통해 나왔을 때 그 남자를 미행한다면 만나서 대화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도로를 횡단하여 그 건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다른 출입구가 있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1층의 이곳저곳을 살펴봤음에도 다른 출입구는 보이지 않았고, 안심한 두오는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그 남자가 언제 출입문을 나올지 두오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그냥 무작정 기다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 남자를 만날 때까지, 한없이 기다리는 것만이.
하지만 19년을 기다린 그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집에 도착한 후 저녁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간 두오가 냉장고를 열고 반찬 몇 가지를 꺼냈다. 그리고 김을 자를 가위를 찾기 위해 부엌 서랍을 연 순간, 그의 눈에 식칼 한 자루가 보였다.
반백 년 넘게 살면서 식칼이란 물건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 보이는 식칼은 뭔가 달라 보였다. 두오는 말없이 오른손으로 식칼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 순간, 보육원에서 품었던 살의가 다시 피어올랐다.
그 사람을 죽이고 싶다.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 사람을 죽일 것이다.
두오는 식칼을 꺼내 갈색 종이봉투 안에 담은 후, 그 종이봉투를 겉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식탁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 두오는 근무가 끝나면 곧장 그 남자의 회사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회사의 반대편에 있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도로 너머로 보이는 건물의 출입문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날에는 아무 소득도 거두지 못했다. 자리에 앉은 채 밤 10시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도로 반대편을 쳐다봤지만, 그가 보육원에서 봤던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퇴근을 한 걸까, 아니면 아직도 건물 안에 있는 걸까. 확신할 수 없었던 두오는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날, 그리고 그다음 날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됐다. 두오는 카페에 앉은 채 오후 6시 무렵부터 밤 11시가 될 때까지 도로 반대편을 쳐다봤지만, 그가 찾는 남자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두오는 흔들릴 때마다 동생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언젠간 그 남자와 대화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언젠간 그 남자가 사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이런 가녀린 희망들이 그의 마음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이 되었을 때 그 희망들은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도로 반대편을 쳐다보던 두오의 눈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유심히 반대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던 두오는 얼마 전 보육원에서 만났던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 후 눈앞의 남자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 남자였다.
두오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희미한 생각 하나가 그를 붙잡았다.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저 사람을 죽인다면…… 나도 저 사람처럼 악한 사람이 되고 만다.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을 붙잡는 생각에 두오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 남자는 조금씩 두오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두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한 표정으로 반대편을 바라보던 두오가 문득 겉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는 식칼의 무게가 느껴졌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30분이었다.
다음 날부터 다시 종적을 감춘 그 남자의 모습을 본 것은 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지난주와 비슷한 시간대에 등장한 그 남자는 건물 출입문 앞에서 잠시 전화통화를 한 후 걸음을 옮겼다. 두오가 시계를 보니 7시 35분이었다. 어쩌면, 그 남자는 매주 월요일마다 같은 시간대에 퇴근하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두오는 다음 주 월요일 다시 와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확히 맞았다. 다음 주 월요일에도 그 남자는 7시 30분쯤 출입문으로 나왔다. 왼쪽으로 사라져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두오는 다시 한번 내면의 자아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을 죽이고 싶다.
하지만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이번에도 그 남자는 어느새 사라졌고 두오는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겉옷 안주머니에는 여전히 갈색 종이봉투가 들어있었다.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이 지났다. 두오는 월요일마다 그 건물로 갔고, 그 남자는 7시 30분쯤이 되면 출입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떨 때는 걸음을 옮겨 왼쪽으로 사라졌고, 어떨 때는 택시를 타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두오는 그 남자가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또 다른 생각이 그 행동을 가로막았다. 답답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와 보니 두 딸은 이미 잠들어있었다. 다윤의 방에 들어가니 다윤이 몸을 옆으로 돌린 채 누워있었고, 두오는 바닥에 앉아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윤의 모습은 이내 두정의 모습으로 변했고, 마음이 격해진 두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왔다.
겉옷을 벗고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자 종이봉투가 만져졌다. 반대쪽 주머니에는 자신과 두정의 사진들이 있었다. 종이봉투와 사진들을 모두 꺼낸 그는 그것들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
그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분 뒤, 그는 뭔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사진들을 집어 들고는 옷장으로 향했다. 이 사진들을 식칼처럼 흉측한 물건과 함께 둘 수는 없었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두오가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낸 후 그 안에 들어있는 식칼을 움켜쥐었다. 벌써 손에서 땀이 나는 게 느껴졌다.
그날따라 시간이 거북이처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두오는 하루종일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겉옷 안주머니에 있는 종이봉투에 집중되었다. 때늦은 점심을 먹을 때도, 퇴근을 앞둔 시간에도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업무를 마친 두오는 지체하지 않고 그 남자의 회사로 뛰어갔다. 급하게 뛰느라 몇 명의 행인들과 부딪칠뻔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릴 뿐이었다. 자신이 항상 이용하던 카페에 도착해서야 심호흡을 몇 번 한 그는 창가 쪽에 앉아서 반대편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7시 30분이 되었다. 잔뜩 긴장한 두오는 매서운 눈빛으로 반대편 건물 출입구를 응시했다. 31분, 32분, 33분……. 시간이 1분씩 흐를 때마다 그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리고 시간이 7시 37분이 됐을 때, 그 남자가 나타났다.
건물 출입구로 나온 그 남자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두오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페를 나와 도로를 가로질러 갔다. 너무 가까이 가서도 안 되고, 너무 멀리 있어도 안 된다. 두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십여 분쯤 흐르자 남자가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간판을 보니 고깃집인 것 같았다. 남자가 이곳에서 얼마나 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무작정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두오는 고깃집 출구가 보이는 곳에 숨은 채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남자가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고깃집에서 나왔다. 두오가 시계를 보니 11시 30분이 지나있었다. 남자는 일행들에게 손을 흔든 후 홀로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자가 일행과 함께 움직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두오는 내심 안심하며 그를 천천히 추격했다. 남자는 골목길을 돌아 횡단보도를 건넌 뒤 바로 앞에 있는 공원 입구로 들어갔다. 공원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려는 듯했다.
두오가 그를 따라 공원에 들어섰을 무렵, 주변에는 적막함이 가득했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봤지만 다른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남자는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공원길을 걷고 있었고, 두오는 떨리는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점점 속도를 올린 두오가 남자 바로 뒤에 접근하자, 돌연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몇 초간 두오를 쳐다봤다.
“누구시죠?”
남자의 질문에 두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망설였다.
이두오,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당신이 버린 이두정의 오빠라고 해야 하나.
남자가 점점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두오를 쳐다보자, 두오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예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지요?”
“글쎄요, 기억이…….”
“두 달 전, 희망 보육원에서 본 적이 있을 텐데요. 그때 같이 식사도 하지 않았나요?”
그 말에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때…… 딸과 함께 왔던 사람?”
아니, 당신 딸이잖아!
두오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졌다.
“그래요.”
“그렇군요. 근데 여긴 왜……. 혹시 나를 따라온 거요?”
“그래, 맞아.”
두오가 자기도 모르게 남자에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용건이 뭐요?”
“용건? 아주 많지.”
두오가 으르렁거리는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두오의 질문에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좋아, 알게 해 주지.
“당신에게 버림받고 죽은 이두정의 오빠라고 하면 알아보려나?”
두오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가 어느새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두오를 바라봤고, 두오 역시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그 사람의…… 오빠라고?”
“그래, 맞아. 두정이가 내 얘긴 안 하던가?”
“근데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인지……. 죽었다고? 그 사람이?”
“그래, 맞아.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지.”
두오는 두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정리한 채 보육원으로 떠난 일, 그곳에서 몇 달을 지낸 후 아이를 낳은 일, 아이를 원장에게 맡긴 후 자취를 감춘 일, 그리고 자신에게 유서를 남긴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까지.
감춰졌던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남자의 눈이 서서히 경악으로 차오르기 시작했고, 두오는 두정이 남긴 유서의 내용까지 일일이 토해놓기 시작했다. 연인에 대한 애정과 증오, 그리움과 원망의 감정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남자를 조심스레 바라봤다.
“그 사람이…… 아이를 낳았다고?”
“그래, 맞아. 당신도 본 적이 있을 텐데?”
“내가 말이오?”
“그래. 그때 보육원에서 만났잖아. 당신이 예쁘다고 한 그 아이.”
“그 아이…….”
“그래, 그 아이가 당신과 두정이의 딸이야. 근데 정작 아버지가 되는 당신은 딸도 못 알아보더군?”
조롱 섞인 그의 말에 남자는 눈을 부릅떴다.
“결국 아이를 지우지 않은 건가?”
그 말을 들은 순간 두오는 직감했다. 지난 19년 동안 가슴속에 쌓여 온 모든 증오와 한이 한순간에 폭발하는 것을. 이미 이성을 잃은 두오는 어느새 겉옷 안주머니에서 식칼을 꺼냈다. 당황한 남자가 두오의 손을 움켜잡았지만 두오의 힘이 더 강했다. 그는 오른손에 쥔 식칼로 남자의 가슴을 찔렀고,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힘없이 쓰러졌다.
“꺄악!”
순간 오른편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두오는 칼을 손에 쥔 채 여자의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오른손에 쥔 식칼에서는 그 남자의 피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 공원을 벗어나자 도로변에 흰색 SUV가 정차 중이었다. 서둘러 다가가 운전석 문을 열자 한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두오가 피 묻은 칼로 운전자를 위협하자 남자는 양손을 머리 위로 든 채 운전석에서 나와 잽싸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운전석에 앉은 두오가 왼쪽을 바라보자 몇몇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두오는 피 묻은 칼을 조수석에 던진 후 액셀을 밟았다. 흰색 SUV가 엔진소리와 함께 질주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두오의 시야는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지나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나. 두오는 가쁜 숨을 애써 진정시키며 양손으로 핸들을 꽉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