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망고 다섯 개
그린 망고 다섯 개를 바라보니 웃음이 나온다.
망고가 노랗게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행복할 것이다.
아침식사로 빵, 달걀 프라이, 사과를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앞 테라스에는 옆집 마리아가 준 에그 플랜트가 하얀 꽃을 피우며 잘 자라고 있다.
학교 쪽에서 흥겨운 음악 소리와 함성소리가 들린다. 무슨 행사가 있나 보다. 모자를 쓰고 큰 음악 소리를 따라나섰다. 도로 양옆으로 자동차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경기다. 천막 밑에서는 아주머니가 음식을 만들며 돌로 된 작은 절구통에 뭔가를 찧고 있다.
“실례합니다. 사진 찍어도 될까요?”
좋다며 카메라를 향해 웃어준다.
“이건 무슨 게임이에요?”
“페탕크예요. 지금 결승전인데 구경하세요. 재미있어요.”
한참을 서서 구경했다. 동그란 원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공을 던진다. 먼저 작은 공 (코코넷)을 목표점으로 던져놓고 또 다른 공(부울)을 던진다. 최대한 코코넷에 가까이 가면 이기는 것이다. 옆에 계신 분이 한번 해 보라며 공을 준다. 볼을 잡으니 묵직하다. 내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잡고 (볼링 볼처럼) 던지려니까 아니란다.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공을 잡고 던져야 한다며 시범을 보여준다. 코코넷에 가까이 있던 상대방의 볼을 정확히 맞혀 튕겨낸다. 그리고 자기 볼이 그 자리에 앉았다. 놀라운 고급 기술이다.
가려고 하자 밥 먹고 가라며 붙잡는다. 밥과 생선, 나물이 들어있는 접시를 들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같이 밥을 먹고 태국 차를 마셨다.
어릴 때 모내기 하던 날 논두렁에 앉아 먹던 새참이 생각났다. 그때도 음식 먹을 때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함께 먹곤 했다. 정과 사랑이 듬뿍 담긴 밥을 배부르게 먹었다.
"밥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꼭 1등 하세요. 응원할게요, "
감사 인사를 하고 나왔다. 계속 돌아다니며 사진 몇 장 더 찍는데 가는 곳마다 밥 먹고 가라 붙잡는다.
콘도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그라운드 필로티를 지나온다. 청소하는 아주머니 두 분이 도시락을 먹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태국말을 못 하는 줄 알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하며 이리 와서 도시락을 같이 먹자 한다. 밥은 이미 먹었고 배부르다고 하자 잠깐만 기다리란다. 저쪽에서 투명 비닐봉지에 그린 망고 네 개를 담아 온다. 오늘 아침에 따온 망고라며 4~5일 후에 먹으라고 한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머뭇거린다. 그녀의 입에 대어준 핸드폰 번역기에 수줍어하며 말한다.
“아침마다 남편과 산책하는 모습이 참 예뻐요.”
고맙다고 말하며 망고 두 개만 집었다. 그녀가 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말한다.
“우리 집에 망고나무가 있어요. 망고 많아요.”
그린 망고 네 개를 들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앉으니 짜릿한 행복감이 밀려온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이 시작한 낯선 방콕생활이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처음 방콕에 왔던 때가 생각난다.
콘도로 들어온 첫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 오후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집에서 안 쓰는 물건들을 가지고 왔어요. 여기선 필요할 것 같아서요.”
프래우 교수와 몇 명의 교수들이 자동차 한가득 살림살이를 싣고 왔다. 밥솥, 전자레인지, 인덕션, 토스터, 커피포트, 프라이팬, 커피잔, 냄비, 쟁반, 유리컵, 포크, 스푼, 접시, 그릇, 텀블러, 칼 세트, 우산, 양푼, 빨래걸이, 옷걸이, 수세미 심지어 과 티셔츠까지 온갖 물건들이 방 안 가득 펼쳐졌다. 뜻밖의 선물에 깜짝 놀랐다.
홈프로에 가서 사려고 이미 목록으로 작성해 놓은 물건들이었다.
텅 빈 거실이 순식간에 살림살이와 사랑의 온기로 가득 찼다. 놀라고 있는데 아팃 교수가 말한다.
“여기 바로 앞에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어요. 밥 먹으러 갑시다.”
맛있는 음식들이 코스별로 줄줄이 나온다.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아팃 교수는 자세히 설명해 준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우리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누군가 이미 계산해 버렸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말했다.
“일 년 동안 편하게 살다가 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귀국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처음 방콕 생활은 정과 사랑으로 시작되었다.
다음 날은 집 앞 마크로 (대형 마트)에 가서 나머지 생필품들을 샀다. 먹고 싶었던 열대 과일까지 식재료를 잔뜩 사서 돌아왔다. 우리 둘 다 양손 가득 물건을 든 채 목에 걸고 있던 카드키로 중앙 현관문을 열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마술처럼 스르르 현관문이 열렸다.
중앙 통로에 앉아있던 경비원이 보았나 보다. 직접 카트를 밀고와 물건들을 싣고 나르는 걸 도와주었다. 덕분에 편하게 짐을 날랐다. 고맙다며 두 손 모아 '코쿤카' 인사하니 그도 기분 좋은 미소로 '코쿤캅' 답했다.
일요일 아침 성당 가는 길, 주차장 칸막이에 눈에 익은 머리띠가 걸려있었다.
“오잉? 내 머리띠랑 똑같네. 한국에서 사 온 건데 여기에도 똑같은 게 있나?”
혹시 몰라 들고 왔다. 집에 돌아와 내 머리띠를 아무리 찾아도 없다. 어제 떨어뜨렸나 보다.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내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 놓은 것 같다. 아마 매일 주차장에서 만나 웃으며 인사하던 주차장 직원이 그랬을 것이다.
남편이 깜빡 잊고 자동차 라이트를 켜놓은 채 집에 온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자동이었으니 습관처럼 그랬나 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혼자 안절부절 차에서 내려 본 네트도 열어보고 무슨 이유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바로 주차장 직원이 달려왔고 무전기로 어딘가에 연락했다. 학교 수리팀이 긴급 출동해서 배터리를 무료로 연결해 주었다. 남편은 덕분에 늦지 않게 출근할 수 있었다. 부르지도 않았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어려워하는 상황을 보고 먼저 찾아와 해결해 준 것이다.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도로로 나온 날이었다. 뒤에 따라오던 차가 경광등을 켜고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말을 하는데 모르니까 그냥 갔다. 이번에는 뒤따라오던 오토바이가 운전석 옆으로 와서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창문을 열자,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은 직접 반대편으로 가서 주유 뚜껑을 닫아주고 웃으며 갔다. 우리는 그제야 알았다. 주유기의 뚜껑이 열려 있다는 것을.
미슐랭 맛집을 찾아간 날이었다. 식당은 쉽게 찾았는데 주차를 못해 헤맸다. 이미 몇 대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식당 앞에 주차했다. 그런데 지나가던 청년이 두 팔로 X자를 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그 의미를 그곳에 주차하면 안 된다고 이해했다. 그가 건물 뒤편을 가리켰다. 말도 통하지 않는 우리에게 가던 길을 멈추고 손짓 몸짓으로 알려준 것이다.
방콕 1년 살이 중 벌써 6개월이 지나갔다. 남은 6개월도 기대된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무슨 일들이 일어날까?
가만히 그린 망고를 바라본다.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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