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먹은 한 잔의 물맛
봄은 짧다. 여름을 준비하느라 더 짧게 느껴진다. 계절의 문턱을 넘기 위한 도약의 거리에 장애물 여러 가지가 날 기다리고 있다. 무너지는 옷더미에 손을 델 엄두를 못 낸다. 섣불리 댔다가는 이 짓을 또 해야 하기에 쇼핑몰을 기웃기웃, 수납장에 들어갈 작은 선반을 찾고 있다.
신혼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장롱 사이즈는 두 짝이었다. 그래서 세트 중 한 짝은 두고 두 짝만 실어 왔다. 그런데 세 번째 이사 온 집에는 그 빠진 한 줄이 아쉽다. 집도 살림에 맞게 커져 남은 공간은 아이 장난감 서랍장으로 채웠다. 원목에 흰색 녹색 플라스틱 서랍장은 아마 국민 서랍장일 것이다. 세 식구 옷은 붙박이장, 침대 밑 서랍, 여기저기 사용하면 두 짝으로도 쓸 수 있다. 한쪽은 남편, 남은 쪽은 나와 민이 쓰고 있다.
작년에 입지 않았다면 내년에도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아니, 없다. 다행히 작년에 무거운 겨울옷을 버려서 조금만 신경 쓰면 된다. 그래도 혼자 들고 내려갈 수 없을 만큼이 나왔다.
“이거 버려도 돼?”
이번에는 남편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일도 더뎌지고 버리기 아깝다며, 추억이 있는 것이라고 나보다 오랜 시간 보낸 천 쪼가리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은지, 못 봐주겠다. 어제 버스에서 본 젊은 부부는 몇 년 전 우리 보는 듯했다.
“사람들 시선은 신경 안 써? 남들이 보면 욕해.”
아내의 체면이 서지 않는 모양이다. 둘은 별반 다르지 않게 편한 옷차림으로 버스에 앉아 다 들리도록 안방 대화를 이어갔다. 남자는 재빠르게 전화를 받고는 그 상황을 모면했다. 남편의 오래되고 색이 바랜 검정 옷들 사이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 비싸지 않은 옷들인 것을 다시금 인식하며 미지근한 연민과 해방감을 느꼈다.
몇 년이 지난 내의와 색이 바 랜 옷들이 바닥에 쌓여갔다. 며칠째 현관에 쌓아둔 택배를 갈랐다. 크기도 커 꺼내고 조립하고 닦느라 에너지 반을 써버렸다. 그래도 딱 들어맞는 슬라이딩 서랍장이 마음에 들었다. 선반의 옷이 무너지지 않도록 공간을 나눠 쓸 수 있고 색도 아이보리로 옷장의 색과 맞아서 보기 좋았다. 왜 이것을 생각 못 하고 쌓아두는 리빙 박스만 생각했을까. 불편함은 발명으로 발전한다. 필요와 경험이 쌓여 이제는 조금만 찾아보면 편하고 깔끔하게 살 수 있다. 시각으로 선별하고 후각으로 점검한 뒤 유행이 지나도 한참이 지난 옷을 버렸다. 아이의 옷은 선별해서 동네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 허리가 휘청~거린다. 아들과 함께 헌 옷 수거함으로 갔다. 녹색 수거함이 먹기 좋게 잘 싸서 넣었다. 남은 양말 가지들은 먼지가 쌓인 곳을 닦으며 버릴 요량으로 남겨두었다.
목이 탄다. 이제 도저히 보리차는 못 끓이겠다. 오래된 아파트라 수도 배관이 신경 쓰였지만 정수기 광고를 여러 개 보다 사은품도 이만하면 되겠다 싶어 결정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좋아 보리차를 연신 끓였지만, 이제는 큰 주전자 하나 닦는 것도 미루는 일 중 하나가 되었으니 잘한 일이다.
“어떤 색으로 할까? 실버? 블루?”
“블루.”
이럴 땐 잘 통한다. 나도 블루가 맘에 들었다. 1주일이 지나 정수기를 설치했다. 요즘 가전들은 앱을 통해서 제어할 수 있다. 연실 기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맛 좀 보시겠어요?”
기사님은 정중하게 한 컵을 건 내주셨다.
*
“저희 회사는 물맛 때문에 많이들 찾아주세요.”
사은품이 없냐는 내 아쉬운 소리에 상담원은 물맛 이야기를 했었다. 물맛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지 의아해 결정을 보류했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 맛본 정수기 물맛은 그야말로 찾는 물맛이었다. 그 상담원의 말에 피식 조소를 품은 것이 되레 미안해졌다.
다음 날 아침,
“얼음 정수기 아니네, 싸구려.”
“응?”
갈치를 발라주는데 손가락이 저렸다. 갈치 살에 밥을 반이나 먹어가는 민이는 내 귀를 의심케 했다.
“싸구려라고 했어?”
듣기 거슬리는 말은 흐리게 해도 귀에 걸린다. 갈치가 누구 입으로만 들어가는데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비용도 비용이지만 여름 한 철에만 얼음을 찾는 우리 집은 딱히 얼음 정수기가 필요치 않다. 그건 내 생각, 남편도 사실 얼음을 많이 찾는데 살림하는 나는 그 결정을 묵인할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코디의 세심한 손길이 더 필요한 얼음 정수기는 처음부터 내 용의 선상에 올라오지도 않았다. 이런 사정을 알 수 없는 민이는 얼음 정수기를 바랐을 것이다.
“돈 하나 벌지 않는 네가 싸구려라고 말하니.”
나는 불쾌한 기분을 잠시 누르고 어떻게 말해 줘야 할지 생각했다. 민이는 밥을 계속 입으로 가져갔다.
“값의 차이는 물건에 따라 다른 거지, 싸다고 해서 나쁘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야. 더욱이 네 입에서 싸구려란 단어가 나오니 듣기가 좀 그렇다.”
민이는 내 얼굴을 바라보는 건지 식탁을 보고 있는 건지 나는 아이의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고선 엄마의 심정이 상했다는 것을 인지한 듯 일어나겠다며 소파로 갔다. 기계음이 화답한다. 주말 10시, 다운타임 해제. 게임을 시작했다.
“말은 그 사람의 품격을 드러내는 거야. 알았지.”
길어지는 것 같아서 두려고 했는데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게임 소리를 그저 듣고, 식어서 단단해진 갈치 살을 발라 천천히 밥을 마저 먹었다.
정수기의 물맛은 정말 달랐다. 처음 먹은 한 잔의 물맛. 다음부터 먹는 물은 그 맛과 달랐으며 점점 익숙한 맛이 났다. 물도 걸러 먹는데 말도 잘 걸러야 하지 않을까. 둔화하는 혀에 급수가 바뀌지 않으려면 정화하는 것을 쉴 수 없다.
옷장을 열었다. 오래된 옷을 버리니 퀴퀴한 냄새는 저만치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