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던 날

마스카라를 했어.

by miya

섬나라에 사는 그녀가 우리를 단톡방으로 불렀다. 수업 중에 무음으로 된 휴대전화가 어찌나 요란하던지 마우스 옆에서 온오프를 반복한다. 나는 할 수 없이 톡 방을 열어 수많은 NEW를 단숨에 내렸다. 이번 주 금요일 6시 김포공항 롯데 몰.


중국, 항주의 추억을 함께한 나의 여인들을 만나러 가야 하는 날이다. 쉬는 날이라도 내팽개칠 수 없는 집안일을 해치워야 한다. 엄마의 숙명, 양쪽 레이더가 동시에 작동해 수영, 이불 털기, 빨래, 설거지를 다 하고 씻으려니 마음은 후련한데 벌써 지친다. 힘을 내야 한다. 모임에 충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무얼 입을까? 옷장을 열고 무난한 옷을 찾았다. 오늘은 엄마의 티를 조금은 벗고 싶다. 고대기를 꺼내 머리카락도 차분하게 만져주고 작은 함을 열어 귀걸이를 꺼냈다. 귀걸이만 해주면 완성인데 왼쪽이 말썽이다. 적당하게 작은 링을 하고 싶은데 왼쪽이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조금은 과하다 싶은 스와로브스키 귀걸이를 꺼냈다. 귀걸이 핀이 조금은 두꺼워 잘 들어가는데 끝에서 들어가질 않는다. 광부가 탄을 캐러 어둠에서 길을 찾듯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여 침으로 끝을 맞추고 있다. 아파온다. 침이 나올 수 있도록 잘 만져보지만 역부족이다. 이제는 힘을 줘야 한다.

‘투두둑’

가슴으로 쏠린 피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왼쪽 귀는 한동안 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결국 소독까지 하고 나왔다. 시간은 나와야 할 시간보다 결국 삼십 분이 지나있었다.

50번을 타고 약속 장소까지 2시간이 걸렸다. 정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래서 집에 올 때는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 괜찮겠지만 버스는 이제 멀미가 날 것 같다. 대충 검색해 보니 지하철로 6 정거장뿐, 40분 만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준비성은 왜 없었을까?


미리 검색했다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50번을 타고 가는 강서 대한항공 길은 내가 20대 다니던 첫 직장, 출퇴근길이다. 이 길을 언제 또 가보겠나 싶어 설레는 마음에 이어폰과 작은 우산을 챙겼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를 지나 원종동으로 접어드는데 내가 익숙하지 않은 길이 꼬불꼬불 이어졌다. 플라밍고가 일을 끝내고 가장 마지막에 합류하기로 했는데 내가 더 늦게 생겼다.

창가에 비친 작은 것이 꼬물거린다. 나는 반대편 사람이 거울에 비친 것인가 생각하다 한참을 가는데 작은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머리띠를 한 작은 여자아이가 일어나 앉은 것이다. 옆에 앉은 젊은 할머니는 손녀의 머리띠를 다시 만져주고 잘 앉혀 주었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난다. 히터를 트신 건지 문을 조금 열었다. 참자, 조금만 더 가면 논두렁이 나온다. 강서 대한항공에 가까워지면 미개발 지역이라 주택가는 점점 사라지고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듬성듬성 컨테이너 창고가 보이고 버려진 논 같은 땅이 사람을 기다리는 것만 같다. 길도 여전히 좁은 1차선이다. 아이는 졸음이 몰려와 할머니에게 몸을 맡기고 손녀를 안은 할머니는 소중한 것을 만지듯 자는 중에도 흐트러진 머리띠를 매만진다.


아직 완전한 밤이 오지 않은 창가에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다. 앉기조차 힘든 나는 버스에 몸을 맡길 뿐이다. 어둠 속 가로등 하나가 얇고 싱싱한 자작나무를 비춘다.

*

나무가 반짝거린다.

아니, 나뭇잎이 반짝거린다.

비를 맞는 중이다.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중이다.

“오늘 달라 보이네?”

“오랜만에 마스카라를 했어. 그런데 너 곧 떨어질 것 같아.”

“나는 쉽게 떨어지지 않아.”


그렇다. 비가 지나가면 언제나처럼 나무는 더 싱그러운 녹음을 내보인다. 아슬아슬해도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을 바라보니 새 힘이 솟는 듯하다. 메이필드가 보인다. 이제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만날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우리는 7년 전에 만났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보다 더 오랫동안 못 본 사이처럼 저마다 마음속에 부푼 기대를 안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너구리와 토끼는 이미 만나 들어갈 곳을 둘러보고 있다. 예상대로 플라밍고는 나보다 먼저 도착했고 나는 결국 느림보 거북이가 되었다.

여전히 플라밍고의 웃음소리는 우아했고, 눈이 큰 너구리는 이야기보따리를 쉼 없이 풀었다. 분주하게 한국일정을 마무리한 토끼는 집이 있는 호주에 가고픈 모양이다.

가을비 내리던 날, 우리는 쏟을 수 있는 애정을 크고 작은 몸짓과 웃음에 담았다. 나는 거북이처럼 그날들을 천천히 떠올리며 조금 더 가까이 그들의 눈을 바라봤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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