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뚫고서
새 다이어리가 반쯤 입을 벌린 채 약속을 속삭인다. 아이를 키우며 소원해진 사이들이 속속히 거리를 좁히려 알람을 울린다. 이번에 안 나가면 내년에 볼지 모른다. 만남의 장소에 웬만하면 간다는 것이 심경의 변화다. 오랜 우정을 나눈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입을 옷에 들 가방까지 그리고 있다. 그 모임들 사이 네모난 빈칸은 선이를 만나게 되는 날이었다.
1월, 바람이 매섭게 분다. 그것도 모르고 조금은 들떠서 옷을 기분 따라 입었다. 얇게 입은 건 아니지만 롱 패딩이 아쉽다.
“제가 모르고 역을 지나쳤어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시청에 좀 들어가 기다릴게요. 1번 출구로 나와요.”
그녀를 부천으로 불렀다. 날씨가 추워 뚝배기 해산물이 좋을지 소고기 샤부샤부가 좋을지 전날에는 브런치 카페도 찾아 링크를 보냈지만 서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우리 둘은 약속한 것처럼 하프 패딩을 입고서 마주 보고 있다. 손을 흔든다. 얼굴이 춥다. 오느라 고생했다며 어깨를 감쌌다. 만남의 기쁨도 잠시 이 추운 골목 바람을 뚫고 나가야 한다.
“어떤 거 먹고 싶어요?”
지난가을 전화를 걸었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선이는 조금 놀라며 전화받았다.
“네 작가님?”
나를 작가라고 부르는 몇 사람 중 그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있다.
“어머 작가님 어디 아파요?”
나도 선이를 작가님이라 부른다. 그녀가 먼저 말을 놓자고 했지만 2년 넘게 부른 호칭 탓에 언니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는다.
“아뇨 잠이 부족해서 자고 있었어요.”
서둘러 미안하다고 하려 했지만 좀처럼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아, 작가님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거절? 아주 멋지게 둘 다 괜찮다며 마음을 다독였다. 다행히 선이는 졸린 몸을 깨워 씻고 있겠다고 했다.
모자 하나를 눌러쓰고 조끼를 걸친 채 집을 나섰다. 날이 따사롭다. 정말 내가 모자만 눌러쓰고 온 것이 신기한지 방실방실, 저기 자전거를 타고 오면서도 웃고 있다. 자전거 바구니에 가방을 놓고 선글라스를 끼고 빨간 니트를 걸친 그녀는 건널목을 지나 나에게 다가왔다.
찰칵,
그런 모습을 찍었다. 하얀 웃음이 치아보다 더 선명해 보였다. 한 시간 전 피곤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다. 정말 나를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저 정말 세수만 하고 왔어요.”
동네를 벗어나서 탁 트인 신도시에 오니 눅눅한 마음이 펴지는 듯했다. 전화를 끊은 순간부터 아니, 그러자고 말한 맺음말부터일까. 머리는 감지 않고 얼굴에 푸석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가벼워진 발걸음이 그녀의 자전거 바퀴만큼이나 경쾌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여름이 아스팔트를 데우고 있다. 그녀는 자주 가는 카페로 나를 안내했다. 어두운 우드색의 실내는 마치 곰돌이 푸가 드나드는 나무속처럼 아늑하고 시원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여기 사장님도 작가예요.”
책이 계산대 옆에 다수 놓여있다. 쟁반에 주문한 커피와 책갈피가 놓여있다. 적힌 문구를 들어 읽는다.
핸드크림, 프레지어, 그 향. ※김그루
단어 하나하나가 향기롭게 이어진 징검다리 같다. 우리도 그런 의자에 앉아 나란히 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천천히 네모난 창을 빠져나간다. 커피는 진하고 볶은 아몬드 맛이 났다. 조금 더 탁한 맛. 작은 쇼핑백에서 종이상자를 꺼냈다.
“유기농이에요. 저도 쓰고 있는데 샤워할 때도 써요.”
그녀는 일찍이 좋은 비누를 골라 써온 모양이다. 그 말을 듣고 어울린다고 느꼈다.
“쓰레기도 안 생기고 좋네요. 고마워요.”
환경도 생각하고 건강도 생각하는 똑 부러진 엄마들처럼 서로를 흡족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 때문에 잠 못 잔 거 아니에요?”
진심에도 없는 소리.
‘저는 나와서 너무 좋아요. 내 몸보다 더 가득 찬 풍선을 낚아 여기 온 것처럼 두둥실 떠서 왔다고요.’
이것은 내내 서서히 몸에서 새어 나가 말 끝에 붙었고 문학적이고도 시시하고도 진솔했다.
점심은 쌀국수. 그녀는 고수를 얹은 빨간 국물을 한입 먹어보라 했다. 낯선 맛이었다. 톡 쏘는 국물, 끝은 개운한 맛!
*
“여기 어때요? 돈가스?”
“음, 괜찮아요.”
샤부샤부와 고민하다 돈가스집으로 왔다. 손이 오늘은 움직이기 싫다고 한다. 상의는 따뜻한데 청바지 탓에 서늘한 다리가 나무 의자를 자꾸만 밀어낸다. 이제 막 오픈이라 데워지지 않은 실내가 아쉽다. 그렇다고 다시 나가 빌딩 바람에 맞을 순 없다.
“카츠 맛있다!”
다행히 육즙이 가득한 고기는 맛이 좋고 담백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꼬깃꼬깃 접힌 마음이 오늘은 그녀에게 있을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