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가족과 떨어져서 명절을 맞이하면 가뜩이나 외로운데 쓸쓸함이 배가 된다. 예전에 인도에서 설을 맞이하여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차례상을 차리며 마음을 달랜 기억도 있다. 그러나 뭐를 한들 신이 날까? 아무리 떡국이 맛있어도, 야근 안 하고 일찍 퇴근해도, 술을 먹어도 흥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홍콩은 우리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명절이 있다. 설날은 춘절, 추석은 중추절로 부르는데 비록 연휴기간은 길어야 3, 4일 정도로 짧지만 '본사 애들은 쉬는데~'하는 억울함은 덜하다. 홍콩은 우리보다 땅덩어리가 작아 어디든 2시간 이내면 갈 수 있어 명절에 가족을 만나러 가기 쉬워 휴일이 짧다고 한다. 또한, 연휴에는 가족 방문뿐 아니라 수많은 홍콩인들이 해외여행을 가고 그보다 더 많은 관광객들이 홍콩에 오는데 특히 중국 관광객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시내 거리에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많은 가족 여행객들과 젊은 남녀가 넘쳐난다.
그중 홍콩의 음력설은 가장 큰 연휴다. 홍콩직원들은 'chinese new year'라 부르던데 과연 설 며칠 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숙소 주변 꽃시장에선 평소와 다르게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북적이며 꽃과 나무, 화분 등을 사고 있었다. 책을 찾아보니 음력설에는 금귤나무와 수선화 복숭아나무와 각종 꽃을 사는데 '항파씨'라고 '꽃시장을 구경하다'라는 뜻이라 한다. 금귤나무는 좋은 기운과 재물운을 불러들이고, 수선화는 재물운, 복숭아나무는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어느새 사무실 입구에도 커다란 금귤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사다 놨다. 어릴때 먹던 낑깡이 생각나 먹어보려 했지만 시도도 하지 말라는 한국직원의 만류로 아직도 맛은 모르겠다.
설날 3일 전에는 사무실 직원들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어항을 닦고, 전구를 교체하고, 화장실 대청소를 하고 방방마다 붙인 부적을 새로 교체했다. 뭔가 분주했다. 또 찾아보니 '싸이라탓'이라고 더러운 것과 함께 모든 액운을 문밖으로 같이 쓸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새해가 되면 절대로 집안을 청소해선 안된다 하는데 새해에 집안으로 찾아온 재물운을 문밖으로 쓸어버린단다. '복이 나간다고? 허허 그런 게 어딨나' 싶었지만 집에 가자마자 작은 내방을 대청소했다. 물론 설 연휴 내내 한 번도 청소하지도 않고 쓰레기도 버리지 않았다.
드디어 새해 첫날이 왔다. 늦잠을 자고 있는데 밖에서 요란한 북소리와 징소리가 났다. 벌써부터 축제를 하는가 싶어 서둘러 나가 보니 큰 음식점 앞에서 사자춤 공연을 하고 있다. 북소리는 힘이 넘치고 꽹과리 소리는 날카로웠다. 사자는 2인 1조로 두 마리가 서로 싸우듯이 춤을 추는데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새해 첫날 음식점을 개시하며 복을 기원하는 행사인 듯한데 차도가 막힐 정도로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여러 개의 기둥 위에서 사자가 뛰며 곡예를 하는 것인데 아슬아슬한 사자의 춤이 연신 두들겨 대는 타악기 소리와 함께 점점 고조된다. 이윽고 음식점 사장이 나와 사자입에 돈봉투를 집어넣으면 사자는 복주머니를 사장과 점원들에게 주며 마무리된다. 나중에는 구경꾼들 마저 복주머니를 받으려 해 복잡했는데 역시 모두 즐거운 얼굴이다.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 새해에 사물놀이를 하며 동네를 다니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렇게 새해 연휴가 시작되니 거리마다 여러 행사가 있었다. 빅토리아 파크 등 여러 곳에 풍물시장이 열리고 야간 퍼레이드, 등불축제 등 다 찾아다니기 힘들 정도인데 그중 가장 큰 행사는 불꽃놀이다.
불꽃놀이는 설, 추석뿐 아니라 무슨 때마다 어김없이 하는 이벤트다. 불꽃을 터트리는 범위가 넓고 시간도 15~20분 정도로 폭죽량도 어마어마하다. 불꽃놀이는 홍콩섬과 구룡반도 해안 인접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지만 인파가 많아 가까이서 보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지난 추석 때 불꽃놀이를 보려 3시간 전에 침사추이로 갔지만 수많은 인파와 경찰들의 통제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아무리 요리조리 골목으로 피해 가까이 가려해도 도처에서 경찰들이 막아서서 군중을 통제했다. 곳곳에 설치된 바리케이드 앞에 서 있으면 어느 순간 열리기도 하는데 아마 적정 규모를 관리하는 종합 지휘소가 있는 모양이다. 하긴 이 큰 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를 통제하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사람 구경 잘~했다' 하며 숙소에 돌아왔는데 숙소 옥상에서도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 허무한 고생이었다. 게다가 바베큐장에서 고기를 굽고 와인을 먹으며 보는 여유롭게 보는 가족도 있어 부럽기만 하다.
또 다른 홍콩의 새해 풍습으로는 라이씨라는 우리나라의 세뱃돈과 같은 것이 있다. 가족뿐 아니라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준다고 하는데 새해가 지나도 한동안 줄 수 있다. 혈혈단신인 나야 상관없다 생각했는데 한국직원들이 내게 홍빠우라는 봉투를 주며
"여기에 돈 20불씩 넣어서 젊은 홍콩 직원들 주세요~, 윗 직급은 줄 필요 없는데 혹시 그들한테 받으실 수도 있어요"
뭐 주는 건 상관없는데 직급이 서로 애매한 홍콩직원이 내게 홍빠우를 준다면 나를 자기 밑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니 받아도 기분 나쁠 것 같다. 반대로 내가 홍빠우를 주면 기분 나빠할 홍콩직원은 없을까도 고민되었다. 아~홍빠우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기분 나쁠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드디어 설연휴가 끝나고 빨간 봉투 15개에 20 불식 넣어 출근을 했다. 언제 줘야 하나 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출근 후 30분이 지나자 모두 자리에 일어나서 홍빠우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도 이때다 싶어 홍빠우를 들고 방을 나왔는데 직급이 한참 밑이라 생각한 홍콩직원이 내게 홍빠우를 건넸다. '아니~너는...' 하며 머리가 띵해지려는데 또 한 명의 내 밑이라 생각한 직원이 홍빠우를 건넸다. '아니... 너마저...' 이럴 수가 있나? 얘들이 나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길래 하며 당황하고 있는데 홍콩직원이 내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받으세요. 이건 서로 복을 주고받는 겁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하~ 그렇구나. 나도 얼른 준비한 홍빠우를 건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름답다. 기분이 좋아진다. 내 복을 나눠주고 타인의 복을 받으니 올해는 왠지 대박 날 것만 같다. 물론 어린 직원들은 대부분 받기만 했는데 내 복을 나눠준다 생각하니 흐뭇하기만 하다.
그런데 또 반전! 그런 아름다운 미풍양속 행위가 끝나고 오후가 되자 홍콩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받은 홍빠우로 내기 도박을 하기 시작했다. 슬쩍 보니 받은 급하게 만든 판때기에 홍빠우 봉투를 걸고 내기를 하는데 외국인인 나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회의실에 모여 크게 한판 벌어졌는데 진정한 축제의 환호성을 들을 수 있었다. 막판에는 결승전이었는지 사무실이 떠나갈 듯 응원을 하는데 매니저고 뭐고 없이 다들 즐겁게 바라본다. 한국직원에게 말하니 작년에도 그랬단다. 힘든 직장생활에 그런 재미도 있어야지. 남들의 시원한 환호성 소리만 들어도 스트레스가 풀렸다.
마지막으로 홍빠우에 대한 이야기로, 내가 사는 숙소에는 관리인들이 여럿이 있는데 평소 무뚜뚝하던 그들이 설연휴가 시작되자마자 내게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웬일이지?' 했는데 같은 숙소에 오래 산 한국직원이 그 기간에는 입주자들이 홍빠우를 관리자들에게 주기 때문에 급하게 친절해진다 한다.
내가 받은 홍빠우 봉투들
그 외에도 음력 보름정도까지 각종 행사가 있었고 우리 사무실에서도 어린 돼지 3마리와 풍성한 음식상을 차려놓고 프로젝트의 성공과 안전을 기원했고 등불 축제도, 홍콩의 경극도 관람하면서 이국의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홍콩에서 이러저러한 낯선 경험을 하다 보니 이야깃거리가 쌓이고 추억이 될 듯하다. 특히, 설 연휴는 재미있는 일이 많아 인도보다는 훨씬 덜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