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말하는 또 다른 세계에 들어왔다. 결혼은 나도 처음이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 첫 경험이 많았다. 나이 서른에 충남 당진을 처음 들어봤고 그곳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오직 나와 남편 둘 뿐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성장통을 크게 겪게 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뭐든 혼자서 잘하는 독립적인 나지만 힘든 게 많아서 남편과의 다툼도 잦았다. 서로에 대한 기대치에 비해 이해나 배려가 부족했었다. 계획대로 임신이 되지 않아 일 년의 신혼 생활이 이어졌다. 남편과의 나이차가 8살이라 양가에서는 아이의 기다림을 재촉했다. 임신 스트레스가 나에게는 힘들었다. 결혼을 선택한 건 혼자서 행복을 찾아가는 인생도 좋지만 둘이서 하면 내가 보지 못한 것들도 함께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결심한 것이다.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다시 일이 하고 싶었다. 뭔가에 몰입할 수 있다면 다른 것들에 집중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을학기부터 천안 신세계백화점에서 미술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백화점에서 강의는 처음이라 설렘이 기분전환으로 좋았다. 다른 일을 시도하고 도전하고 싶었지만 결혼은 내가 원하는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강의를 하면서 많은 부분들이 완화되어 갔다. 겨울학기를 앞두고 홍콩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몸 컨디션이 다운되고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았다. 몸의 반응이 평소와 달라졌다. 기다리던 임신이 된 것이다. 첫 임신이라기쁨도 있었지만 놀라움과 동시에 두려움도 함께 다가왔다. 외적인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임산부의 모습은 엄청난 변화였다.
첫 번째 임신은 변화와 함께 즐거움도 많았다. 체중도 관리를 한 덕분에 심하지 않았고 임부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다. 입덧도 일정기간만 지속되어서 지낼만했다. 당진에서의 출산이 염려되어 동탄으로 원정 출산에 유도분만을 하기로 했다. 입원을 하기 몇 시간 전까지 쇼핑을 할 정도로 체력도 컨디션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인생은 한치도 예상이 안되기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10시간 이상의 진통 끝에 자연분만으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이후에 문제가 발생했다. 유도분만이 힘들었던 것이다. 출산 직후 자궁 수축이 되지 않았고 출혈이 과다했으며 결국 심정지까지 왔다. 자궁 수술을 진행하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산소 호흡기에 몸은 다 묶여 있었다. 선생님들이 걸어 다니는 게기적이라고 했다. 살면서 기적이란 게한 번은있었다. 매번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하면서 감사한 마음이다. 그때 살아났기에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다.
출산과 동시에 경단녀가 되었다. 4살까지 기관을 보내지 않고 혼자서 육아에 몰입하고 있었다. 아이가 주는 기쁨도 행복도 많았다. 남편과 아이가 있어도 뭔가 다 채워지지 않는 건 왜일까? 답답함이 지속되면서 해소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다시 용기를 내야 하는 시점이었다. 쇼호스트를 준비할 때 알았던 퍼스널 컬러와 이미지 메이킹 강사일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먼저 자격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주 1회주말 서울에서 수업을 듣기로 하고 남편에게 아이를 부탁했다. 당진에서 서울까지 자차로 왕복 4시간 이상이었다. 힘들어도 새로운 도전이고 목표가 있기에 없던 에너지도 생겼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꽉 찬 하루가 좋았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미지메이킹 강사일을 할 생각에 기대감이 컸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찾으며 극복해야 했다. 왜 블루오션이라고 했던가 그 말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었다. 현실은 레드오션이었다. 막막했지만 나의 무모한 도전은 시작되었다. 활력이 생기니 남편과의 사이가 좋아졌다. 여기서 반전이 온다. 새로운 시작과 동시에 우리에게 둘째가 찾아왔다. 힘들게 시작한 것이기에 아이도 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보기로 했다.
일도 육아도 현재 진행형이다. 쿨톤 남매 중 첫째 아들은 초등 5학년 둘째 딸은 초등 1학년이다. 이쯤 되면 육아가 아주 조금은 수월해졌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은 초등 3학년부터 지적장애 판정을 받고 특수반을 선택하게 되었다.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아픔을 겪고 있다. 그로 인해 외적이 부분에 변화가 생겼다. 힘듦이 계속되니 소화장애가 심해져서 음식을 먹지 못할 때가 있다. 둘째 출산 후 흔들림이 없던 체중이 빠지면서 달라졌다. 스타일링에 도움이 되었다고 좋게 생각하려 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디자인으로 미대 진학을 했고 어렵게 편입을 하면서 서양화로 전공을 바꿨다. 대학원은 미술교육으로 졸업했다. 20년 이상의 미술 경력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도전했다. 강의를 하기 위해 제안서를 작성한 것만 800여 개가 넘는다. 하지만 결과물은 아주 미미하다. 성과로 보면 벌써 포기해야 했고 창피하기도 하다. 스타일 아트 디렉터 아트 JY컬처 연구소의 1인 기업 대표라는 명함도 이제는 내려놓으려 한다. 보이고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닌 가장 나다운 모습과 방법으로 답을 찾아가며 완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