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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쿰파니스 Apr 24. 2024

비님 오신 날에

240415. 감사 일보 2.

세상에는 감사할 일이 길가에 돌멩이처럼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믿었다.

하루 감사할 일 다섯 개쯤이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도심은 차도도 인도도 포장을 잘해놓아서 돌멩이 구경이 힘들다.

어쩌다 하나라도 있을라치면 청소하시는 분이 바로 치워버린다.

감사할 일도 그런 것 같다.


아침부터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발정 난 개처럼 여기저기 쏘다 다녔다.

'킁킁'은 못했지만 눈에 불은 켰다.

겨우 다섯을 억지로 꿰맸다.


경복궁 흥례문

모자


잠잘 때 빼고는 머리를 덮는 편이다.

연식이 더해가면서 머리카락도 노후화되었다.

하나 둘 빠져나간다.

혹시나 바람에 날려 빠질까, 그래서 모자를 즐겨 쓰는 편이다.


일전에 샀던 모자를 바꾸러 갔다.

종일 머리가 지끈거리면 아팠다.

너무 멋을 생각해서 한 치수 작은 걸 데려왔었다.

여름 멋쟁이 떠 죽고, 겨울 멋쟁이 얼어 죽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맞는 모자 크기를 배웠다.

머리둘레를 재되 이마와 뒤통수를 도는 타원 형태여야 한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 둘은 들어갈 정도가 되어야 자기 머리에 맞는 모자 크기라 한다.

이게 제일 자연스럽다고 한다.


모자집 주인이 이걸 몰랐을까.

알았겠지.

어떻게든 팔아 보려고 기능보다는 멋을 우선했을 테지.


교환이라고 말하며 모자를 내밀었을 때,

즐겁게 거리낌 없이 친절하게 바꾸어주었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고마웠다.

아마도 단골이 될 듯하다.


먼지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공기를 씻었다.

땅을 적셨다.


며칠째 먼지를 많이 마셔서 밤이면 목이 컬컬했다.

담배를 쉬지 않고 한 갑 피운 듯한 증상이었다.

먼지 때문이었다.


그 먼지가 씻겨나갔다.

목이 편하다.

비가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인텔리젠시아 서촌점. 간판이랍시고 로고만 덜렁 달려있다. 저거 해석하느라 고생 많았다. 다들 어떻게 알고 찾아와 줄서서 기다리는지... .


커피


날마다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어제는 '인텔리젠시아'라는 카페에서 드립 커피를 마셨다.

미국 3대 스페셜 커피 브랜드 중 하나라고 했다.

대기 줄이 제법 긴 집이다.

하긴 미젠데.


더위 탓에 얼음 동동 띄워 보리차 마시듯 했다.

7,000원짜리였는데.


비 내리는 오후,

'메가커피'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1,500원짜리다.

창밖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며 홀짝거렸다.


커피는 원두의 품질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분위기인 것 같다.

분위기 한 스푼 더 넣었을 뿐인데 맛이 훨씬 우아해졌다.

빗님 덕택에 맛있는 커피 마셨다.

고맙다.


율곡터널. 12년 걸린 공사다. 개통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터널


평소 터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통행료 때문에, 소음 때문에, 매캐한 공기 때문에... .

오늘 알았다, 그건 편견이었다.

다 같지는 않는데 그간의 불쾌한 경험만 앞세워 괜히 미워했었다.


길을 걷다가 터널 앞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우산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바로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인도와 차도가 분리된 곳이었다.

아늑하고 조용하고 쾌적했다.


터널에게 무한 고마움을 느꼈다.

비 때문에 덤으로 감사 일기 항목 하나 챙겼다.


택배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유튜브 영상을 하나 보았다.

'시클'이라는 책을 소개받았다.

궁금했다.

가입한 도서관에서 폭풍 검색했다.

없다.

이러면 사고 싶어진다.


침대에 누워 '알라딘'에 주문했다.

이런 횡재가, 택배비 무료다.


이화장 뒤 낙산공원을 뒷마당으로 하는 산동네에 산다.

집에 오니 현관 앞에 책이 있다.

포장을 뜯으며, 그분을 생각했다.

비는 오는데 그 많은 계단을 올라와 왔을 노고를.

직업 여부를 떠나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오늘의 감사일기 끝.


내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


광화문에서. 솜사탕 같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북악산에 오르면 한입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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