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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장 오사주 Oct 20. 2024

가스라이팅보다 무서운 사주라이팅

나이: 30대 후반 성별: 여성 직업: 회사원

고민: 제가 정말 탕화살이 있어 급발진하나요?



몇 년 전부터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조종한다는 ‘Gaslight’라는 영어 표현에서 나왔지만, 외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쓰이는 느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자니까 그러면 안 돼" "여자가 왜 이래" 식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상대를 조종하고, 또 조종당해 온 시간이 길었다. 그렇게 쌓여온 울분으로 말미암아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심리 조종술은 연인 사이에도 많이 보인다. 공식 석상에서 상대 여배우의 손을 잡지 못하도록 유명 배우인 남자 친구를 세뇌한 어느 여자 연예인의 사건은 이미 유명하다. 자신의 남편을 빚쟁이로 만들다 못해 계곡에서 도발까지 해 숨지게 만든 일 역시 전 국민이 다 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내게 온 내담자 중에도 이런 식의 피해자가 많다. 가장 황당한 건 자신이 어설프게 아는 사주 지식을 이용해 상대에게 가스라이팅, 아니 사주라이팅(?)을 시전한 사례다.


피해자인 여자분은 무료로 사주를 봐주는 오픈채팅방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됐다. 그는 여자에게 도화살이 있어 남자들에게 알 수 없는 오해를 사고, 그로 인한 사건 사고로 괴로울 거라고 말했다. 우연인지 도화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분은 얼마 전 작은 오해로 연인과 이별한 상태였다. 남자를 향한 신뢰도가 상승했다. 이때부터 여자는 남자의 모든 말을 철석같이 믿게 돼 실제로 만나 사귀기까지 한다. 문제는 그 후부터였다. 어쩌다 맞힌 도화살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남자는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살을 여자의 사주에 마구 갖다 붙이며 사주라이팅을 했다.


"제가 화 기운이 많아 화도 잘 내고, 그 뭐였지 타… 탕… 무슨 살도 있다던데…."
"탕화살이요?"
"네, 그거요. 그거 때문에 급발진을 잘한대요. 그런데 저는 정말로 다른 사람한테 소리 한 번 지른 적이 없어요."


화 기운이 많다고 화를 잘 낸다는 소리는 토 기운이 많아 구토를 잘할 거라는 소리와 다름없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거니와 자연 속 불에 대한 이미지만 떠올려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모닥불을 피우려면 마른 장작이 필요하고, 처음 불씨가 지펴지면 후후 공기를 불어 넣어야 하는 등 여러 규칙이 필요하다. 그래서 화 기운이 많은 사람들은 순서, 규칙, 예의를 중시한다. 또한 모닥불 앞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처럼, 화 기운이 많은 사람 곁에 가면 특유의 따스함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목소리를 높일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삶의 중요한 부분에 열정적으로 몰입해 폭발력 있게 자신의 진가를 드러낼 수 있다. 이게 바로 탕화살이다.


'어떻게 저렇게 곧이곧대로 믿지?' 싶을 수 있지만, 이별한 지 얼마 안 된 대다수의 남녀는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불안한 상태다. 거기에다 답답하고 억울했던 일이, 도화살이든 뭐든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에 의해 발생했다고 하면 이해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런 지혜(?)를 준 사람에게 빠지고 의지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완전 사이비였네요."
"그쵸? 완전 사이비 선무당이죠. 애초에 도화살이 있다고 남자한테 오해를 사거나 그러지도 않아요."
"그런가요?"
"네, 현대사회에서 인간관계에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그 사람은 그냥 잊으세요."
"그래야죠."
"앞으로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떠들면 그냥 싹 무시하세요."
"네."
"제가 왜 싹 무시하라고 하는지 아세요?"
"왜 그런가요?"
"개 쌉소리니까요."

깔깔 웃는 내담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사주 처방

신신애 씨의 유행가 ‘세상은 요지경’의 가사처럼 짜가는 늘 판칩니다.

타인의 왜곡된 해석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본래 기운을 믿고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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