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치유의 시간
엄마는 평소의 바람대로 자신의 침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랑해, 영원히.'라는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엄마의 빈자리가 선명해질수록 내 몸은 점점 더 망가졌다.
'속이 아파서 못 먹겠어.'라며 식사를 거의 못하던 엄마였다.
같이 끼니를 거르면서 문제가 생겼는지, 나 역시 뭘 먹어도 소화를 시키지 못했다.
잠이 들면 가위에 눌리는 탓에 불면증이 이어졌다.
체중은 끝을 모르고 떨어졌고, 겨울이 오기 전인데도 오한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병원에 가도 딱히 차도가 없는 고통은 차라리 저주 같았다.
난 엄마의 딸인 동시에, 아이가 둘인 엄마였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던 참이었다.
당시 TV에서는 '꽃보다 할배 '스페인 편이 방송 중이었는데,
바르셀로나를 방문한 할배들 중 특히 햇살에 녹아든 신구 님의 밝은 표정과 웃음소리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르셀로나의 커다란 태양과 그 따스함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에 가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다.
"바르셀로나에 가고 싶어. 일주일만이라도."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남편을 졸랐다.
"회사는 어쩌고. 난 휴가 못 내."
바쁘다는데, 더 채근할 수 없어 막막했다.
그러다 남동생이 떠올랐다.
호주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위중한 엄마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있던 차였다.
영어가 유창하고 외국생활에 익숙한 남동생과 함께 가겠다는 말에 남편도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다.
"애들 잘 보고, 네 건강도 잘 챙겨."
공항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남편에게 몇 번의 다짐을 하고서야, 우린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초등학생인 큰 아이는 겨울방학을 맞았고, 회사에 묶인 남편이 없으니 오히려 여유롭게 여행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40일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미처 남편에겐 말하지 못한 사실이 있어 마음이 불편했지만.
다시 호주로 가야 하는 일정 탓에 더 시간을 낼 수 없는 남동생은 우리와 일주일만 함께 할 수 있었다.
동생은 그 시간 동안 나와 아이들이 지낼만한 안전한 숙소를 찾아주겠다며 열을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아주 괜찮은 집을 발견했다.
나와 아이들이 지내기에 딱 적당한 사이즈의 아파트였는데, 그 집의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옆으로 긴 통창으로는 파란 하늘이, 거실에서 이어진 발코니에서는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보인다는 것이다.
"누나, 여기 진짜 괜찮다."
"어. 마음에 쏙 들어."
동생이 떠나야 하는 날이 되어서야 겨우 찾은 그 집에서,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여기라면, 안심할 수 있을 거 같다." 라며 공항으로 떠나는 동생에게 나와 아이들은 손을 흔들었다.
진짜 우리만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린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해변으로 향했다.
파도가 움직일 때마다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모래알을 느끼고,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까먹었다.
저녁 무렵에는 해변가에 나란히 앉아 일몰을 감상했다.
가끔은 구엘 공원을 찾아 신구 할아버지처럼 모자이크 타일 위에 내리쬐는 햇빛을 받았고, 보케리아 시장에서 신선한 과일과 해산물을 사 와 요리했다.
가우디의 화려한 건물들을 구경하고, 걷다 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렇게 누가 먼 저랄 거 없이 우리는 바르셀로나의 매력에 푹 빠졌다.
지난 3년.
엄마의 투병생활에 지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11살, 7살인 아이들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별거 아닌 일에도 까르르 웃었고, 나는 그 웃음소리에 힘들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생경했으나 그 모든 것이 위로였다.
따뜻한 날씨 속에 우리는 걷고 또 걸었는데, 그 탓인지 어느새 아이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는 나를 발견했다.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니 체력도 서서히 좋아지고, 통잠은 아니어도 조금씩 잠이 늘었다.
바르셀로나의 공기는 내게 '다시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해준 것만 같았다.
엄마를 기리는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여행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해변에서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편만 허락한다면, 이곳에 한 1년쯤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남편은 일이 바빠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엄마도 없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던 그때였다.
'띠링'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가 남겨주신 집의 세입자에게 온 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