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드라잇터 #1
진석에게 오늘과도 같은 하루의 시작은 처음이었다. 이런 상황에 부닥치자 그가 선택한 일은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처음에 계획했던 하루를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의 시작. “이 건물 5층이라고? 뿜뿜 노래밤은 또 뭔데? 노래방도 아니고.” 충무로 역에서 멀지 않은 장소. 서울의 오래된 건물들이 이어진 골목. 식당, 주점, 병원 등을 나타내는 잡다한 간판들이 일정한 규칙 없이 붙어 있어, 가뜩이나 복잡한 골목을 더욱 혼잡스럽게 보이게 한다. 게다가 그 옆으로는 진양상가 건물까지 있어 여기저기 주차된 자동차들도 많았다. 오가는 사람은 적은데, 철 지난 문명의 흔적만 여기저기 남아있는 모습이 도시 특유의 황량한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흔히 말하는 을지로 감성, 요즘은 이런 느낌을 레트로 감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을지로에서 늘어나기 시작한 독특한 스타일의 개인 카페들은 충무로까지 뻗어왔다. 진석은 그런 것들을 자세하게는 몰랐다. 그의 여자친구인 민영이 이런 곳을 다니는 것을 좋아해 어쩔 수 없이 조금 주워 들었을 뿐이다. ‘여자친구’, 아니 ‘여자친구였던’ 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뭐 엘리베이터도 없어 여긴, 아오...” 진석은 입이 직설적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나 아주 친한 사람 앞에선 조금 더 거칠어지는 면이 있었다. 그래도 욕을 입에 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건물 5층에 카페라니, 기가 찼다. 왜 이런 곳에서 보자고 했던 거지. 솔직히 진석은 머리가 조금 혼란스러웠다. 깊은 생각을 할 상태까지는 아니었다. 반복적으로 발을 움직인다. 계단 바닥에 층수가 표시되어 있다. 숨이 제법 찰 정도가 되니 숫자 5가 나타난다. 카페는 입구로 보이는 흰색 문에 한문으로 몇 글자 적은 종이가 붙어 있다. 새로 칠한 새하얀 문, 건물 외벽의 색 바랜 흰색과 그 느낌이 아주 대조적으로 다가오는 문이다. 미묘하게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며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넓네 여기, 생각보다 더’ 들어서는 순간 시야가 탁 트인다. 넓은 공간을 가진 카페. 검은색 원형 테이블이 줄지어 나열된 모습이 진석의 눈에 들어왔다. 12시, 아직 사람이 거의 없어 테이블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큰 망설임 없이 왼쪽 큰 창가에 앉았다. 창을 끼고 붙어있는 반원형의 베이지색 테이블. 이 테이블만 검은색이 아니었다. 구석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조금 의외의 선택이었다. “어서 오세요. 메뉴판 드리겠습니다.” 착석을 하니 젊은 남자로 보이는 주인장이 메뉴판을 내어준다. “프렌치토스트 먹고 싶어 나. 먹으러 가자!” 그는 민영과 여기서 프렌치토스트를 먹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카페 겸 와인 바인 ‘섬광’. 주로 낮에는 카페, 저녁 6시부터는 와인 바로 운영되고 있다. 커피나 에이드류 음료와 디저트도 제법 준비되어 있지만 와인과 안주로 곁들이는 음식의 종류가 많았다. 진석은 커피보다 와인 쪽에 더 눈이 갔다. 어쩌다 보니 알코올이 좀 필요한 하루를 보내게 된 그. “어디쯤 왔냐?” 진석은 핸드폰을 들었다. 그 남자는 메시지를 보내도 읽지 않을 테니 전화를 걸었다. “거의 다 왔어. 형. 그런데 정말...” “됐고, 너 뭐 마실래?” “하 참 내... 내가 거기 뭐가 있는지 알고?” “커피랑 와인, 뭐 다른 것도 있고.” “난 둘 다 별론데~” “그래, 그럼 알아서 시킨다. 끊을게.” “아니 잠...” 진석은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더티 초코, 순간 눈에 띄는 음료를 아무거나 골랐다. “프렌치토스트랑 이 와인 한 잔이랑 더티초코. 이렇게 주문할게요.”
섬광의 주문을 하는 카운터는 바 형태의 테이블로 되어 있었다. 이 카운터 쪽만 보면 영락없는 와인바다. 나무로 된 기다란 바에 와인 잔이 빼곡하게 줄지어 놓여있다. 뒤쪽 벽면의 선반 또한 그렇다. 가운데 한문으로 섬광이라 적은 종이가 붙어있고, 양옆으로 스피커와 음향기기가 들어간 구조. 그 아래쪽으로도 역시 술병과 잔들이 자리를 잡았다. ‘와인... 대낮부터 술이군’ 진석의 감정이 또 요동치려고 한다. 아직 아침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창가를 내다보았다. 기분 탓인지 창 밖 풍경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삭막한 충무로 골목길의 건물들만 눈에 들어왔다. 혼잡한 건물과 지저분하게 연결된 전선을 보고 있자니 그의 심경은 더욱 복잡해졌다. ‘왜 그랬을까 나는... 도대체, 왜...’
2. “우리 이제 그만 만나.” 민영에게 연락을 받은 건 오늘 아침. 이제 막 나갈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진석이 일어나는 시간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아침. “... 그래. 알겠어” 잠시 숨을 고른 후, 그는 떨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통화를 끊었다. ‘이럴 사람이 아닌데... 헤어질 때는 다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을 잡는군.’ 진석은 그렇게 아침에 차였다. 그 순간엔 민영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말을 꺼낸 이유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오늘 만나기로 약속까지 잡아놓고 아침에 차 버리다니... 그동안의 민영을 생각했을 때,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지.” 그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멈추었다. 이제 어떻게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본들 그것엔 아무런 의미가 들어있지 않았다. 진석은 지나간 일을 곱씹어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하루가 순식간에 붕 떠버렸다. 연애 특유의 옭아매는 느낌이 사라졌다는 후련한 감정과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좋다고도, 싫다고도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 그것은 시원했지만, 동시에 몹시 차가웠다. 몹시도 공허한 그 응어리는 심장 한쪽에서 생겨나 핏줄을 타고 점점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후우...” 일단, 그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월세방에서 피우는 건 금지되어있었다. 이성은 참으라는데, 몸은 반대로 움직인다. 미약한 불꽃이 전달해주는 옅은 온기가, 형체 없이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연기가 조금씩 조금씩 그의 한기를 누그러주기 시작했다. 물론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진석의 시야는 놀라울 정도로 좁아졌다. 약속의 상대가 없어졌으니, 상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약속의 상대방이라는 생각. 가장 익숙한 이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오늘 뭐해? 12시 충무로 올 수 있어?” “어 형, 잠깐 일정 좀 보고...” “뭔 일정? 어차피 일없지? 커피 살 테니 와라.” “아니 형, 이 형은 내가 맨날 노는 줄 아나...” “끊는다.” 이제 상대가 생겼으니 다음은 준비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면 된다. 진석은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다. 다른 생각이 자꾸 올라오려는 것을 그는 의도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저 씻고 나가면 된다. 그렇게 계속 되뇌었다. 하지만 “아 씨발... 도대체 왜!!” 자신의 마음대로 될 턱이 없는 일이었다. 이번엔 예전의 이별과 달랐다. 떠오르는 생각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발로 침대를 걷어차고 베개를 주먹으로 몇 번 내리쳤다. 몸에 열기가 돌고, 발의 통증도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제야 진석에게 하루를 시작할 힘이 생겨났다.
3. “형 차였다면서...요?” 손을 느슨하게 흔들며 진석에게 남자가 다가온다. 힘없이 웃는 표정. 카멜색 코트의 단정한 차림의 남자는 누가 보아도 선한 인상을 가졌다. “소문 빨리도 들어가네. 네 시간도 안 지났는데.” “누나가 성은이랑 친하니까 모 나한테도 당연히 들어오는 거 아냐?” “그러냐... 앉아.” 성현, 진석이 아는 가장 바른 남자다. 유한 성격에 사교성이 좋은 사람. 그와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됐다. 민영과도 안면이 있다. 성현의 동생인 성은과 민영은 학교 선후배 관계로 아주 친한 사이였다. “야 여기 올라올 때 좀 높지?” “그러게 좀 높던데요, 에베레스트 올라가는 줄.” “뭘 또 그 정도까진. 민영이는 왜 여기서 보자고 그런 거지...” “형 근데 언제 차였어요?” “오늘 아침. 어제 여기서 보자고 했었는데, 오늘 그만 만나자고 전화가 오네.” “아니 진짜요? 누나가? 그런 성격 아니지 않나...” “나도 좀 이해가 안 가. 솔직히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형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설마 또 응 그래. 그럼 안녕. 이렇게 끝낸 건 아니죠?” “... 너 심각한데 시비 거냐?” 진석은 운명이나 인연을 믿지 않는다. 결국, 이렇게 된 결과는 자신의 선택과 민영의 선택이 합쳐진 결과 일 뿐이다. 그녀가 이렇게 이별의 말을 꺼낸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고, 자신이 붙잡지 않은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이 상황을 매듭지으리라 오면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덤덤하게 이별을 받아들인 자신의 선택이 옳은 건지에 대해, 진석은 가슴 한켠에 계속 석연치 않은 무엇인가가 남아 자꾸만 행동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하, 정말 그랬나 보네... 형도 웃겨. 그렇게 차이고 여기를 왜 와요?” “야 몰라 나도. 아깐 정신없었어. 그리고 ...오늘은 여기에 왔어야 하는 날이야. 아침에 그런 일이 일어났어도...” 말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진석도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댈 수 없었다. 민영이 여기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어떤 말을 했을지. 또 그걸 바라보는 자신은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런 상상들만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미련이 남았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아직은 한 사람을 잊기엔 너무나 빠른 시간인 걸까?
“... 근데 여기 좋은데요? 느낌이 형이랑 좀 잘 어울리기도 하고.” “뭐가 어울려?” “어? 음... 일단 검은색? 형 오늘도 까맣게 도배했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여기 가게 분위기가 좀 그래요. 그... 형 좋아하는 영화 있잖아요, 옛날 영화... 그 .. 누아르? 뭐 그런 영화에 나올 거 같은 분위기에요.” “....” ‘다 검은색이라...’ 얼추 맞는 말이라 진석은 대꾸할 거리가 없어졌다. 검은색 모직 코트 안에 라이더 재킷을 받쳐 입었다. 바지도 구두도 머리색도 다 검은색이다. 유일하게 티 한 장만 흰색을 입었다. 누아르 영화를 좋아하는 그. 전반적인 홍콩영화의 팬이었지만, 특히 누아르 장르에 빠져있었다.
“음식 여기 놔드릴게요.” 가게에서 유일하게 베이지색인 그들의 테이블에 음식이 놓인다. 햄과 방울토마토가 올라간 두툼한 프렌치토스트, 로제 와인 한잔과 초콜릿이 수북하게 올라간 음료 더티초코까지. “형 이거 마셔도 돼요?” “어. 너 마시라고 시킨 거야.” “오올 그럼 잘 마실게요! 아오 뜨거라.. 달달하네 요거. 약간 그 네X퀵 비슷한데요? 크크” “야 비싼 건데 네x퀵이 뭐야”
성현은 더티초코를 맘에 들어했다. 네스퀵이라니, 진석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한번에 와 닿는 표현이라 어떤 맛일지 감이 잡혔다. 그도 코코아를 많이 마셔보진 않았다. 더티초코는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독특해 보이는 음료였다. “초콜릿 씹히는 게 개꿀이에요 형. 형도 마셔볼래요?” “아니 됐어, 난.” 진석은 뭘 입에 댈 기분이 아니었다. 한 모금 마신 와인은 생각보다 도수가 높았다. 조금만 마셔도 술기운이 느껴졌다. 차라리 그게 좋았다. 오늘은 진탕 마셔야 하나, 잠시 그런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역시 그럴 날은 아니었다. 술로 풀어서 풀릴 문제가 아니니. “형 프토 미쳤다, 존맛탱이에요.” 맛집 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현은 음식을 이래저래 설명하면서 먹는 습관을 지녔다. 진석의 눈치는 보지도 않고,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위에 올라간 프로슈토 햄이랑 리코타 치즈 그리고 토마토의 조합이 재미나단다. 진석은 들어도 뭔 소린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햄이라고는 스팸, 치즈는 피자치즈만 알았다. “누나가 잘 골랐네, 가게. 형 솔직히 복 받은 거라고요. 맨날 이런 데 찾아서 데려가는데.” “그만 해라.”
프렌치토스트가 부드러운 식감이라 그것도 맘에 든다는 성현. 그만의 과장 섞인 손짓을 보이며 말을 이어간다. 맛이며 식감이며 재료까지 하나하나 뭐라고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 음식 쪽에 아는게 많은 남자. 취미가 요리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진석은 상대가 필요해서 그를 부르긴 했지만 차인 날에 음식 얘기만 듣고 있게 되는 전개를 예상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생각만으로도 지금은 벅찼다. 그리고 듣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이별의 생각을 띄엄띄엄 잊어버리고 있기도 했다. “와인은 어때요? 보기에는 약해 보이는데.” “아냐. 생각보다 도수가 있어. 너는 잘 못 마실걸.” “에이 형 저도 이제 술 좀 마셔요. 알쓰 아님! 아 와인 보니 치킨이 끌리네...” “웬 치킨이야? 어이가 없네. 와인이랑 뭔 상관이라고.” 배시시 웃으며 프렌치토스트를 큼직하게 잘라먹는 성현. 항상 잘 먹는 그는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생각 이상으로 많이 먹는데, 의외로 슬림한 체형이다. 진석처럼 운동을 꾸준히 하지도 않는데 체질을 타고난 듯싶었다. 먹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진석은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장국영... 장국영이군...’ 멀리 카운터 뒤쪽, 선반에 놓인 장국영의 사진이 진석의 눈에 띈다. 레코드 앨범이다. 만우절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배우 겸 가수. 진석은 그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눈빛에 젖어있는 무심한 공허감, 소년 같은 외모 뒤에 항상 그 쓸쓸함이 그늘져 있어 멋있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처럼 살고 싶었다. 발이 없는 새가 되어 하늘을 날다, 생을 마감할 때가 되면 땅으로 내려오는 그런 삶을... 어릴 때는 그저 막연히... 막연히 동경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든 후 다시 그의 작품을 보고 나선 그의 삶 자체에 빠져들었다. 짧고 굵은 선을 남기고 간 남자, 마치 섬광처럼. “형... 있잖아요....” 어느덧 이곳에도 사람이 많아졌다. 평일임에도 사람이 제법 복작거리는 카페. 오픈 무렵의 조용한 모습과 비교해보면 전혀 다른 공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사람이 차 있을 뿐인데, 공간은 이렇게나 대비되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주변의 이야기 소리가 커질수록 둘의 대화도 점점 깊어져 간다. 주변의 소음과 와인의 옅은 취기가 조금씩 조금씩 각자의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그래서 왜 차인 거 같아요?” “몰라. 생각 안 해봤어.” “솔직히 형이 호감은 아니에요. 그쵸?” “아니 이 새끼 자꾸...” “형 일단 조금만 들어봐요. 저 알아요. 매번 똑같잖아요. 갈라서는 이유가.” “...” “형 진짜로 누나 좋아했어요?” “응.” “이번엔 바로 대답하시네요? 그래도 애정표현은 거의 안 했죠?” “아마...?” “아마? 내가 그럴 줄 알았지. 형은 항상 그렇게 살아요. 주변을 잘 안 봐. 멀리서 보면 형은 참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그래, 이 가게 이름처럼... 형은 섬광처럼 빛이 나고 섬광처럼 눈에 확 띄어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가까이 가서 좀 들여다보고 싶거든요. 저도 형 처음 봤을 때, 뭔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약간 그런 후광 같은 게 있었거든요. 솔직히 스타일 좋고 성격도 시크하고 그러니까... 뭐... 못생기지도 않았...” “말을 흐리네?” “근데 딱 거기까지 에요. 그래서 접근했던 사람 금방 다 나가떨어졌잖아요. 형이 섬광이면 모해, 주변을 하나도 안 보고 지나가는데... 그런 사람 누가 옆에 있고 싶겠어요.” “...” “그래도 이번에는 힘들죠?” “다 지나갈 일이야.” “말 돌리지 말고요. 좋아했다면서요. 이유도 모르고 차였는데 힘들지.” “그래...” “저도 형 누나랑은 오래갈 줄 알았어요.” “한 대 태우고 올 게.” 혼란스러웠다. 진석은 잠시 자리를 떴다. 나가는 문 앞에 손가락, 손가락이 보인다. 뭘까 이건... 왜 붙여 놓은 걸까...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기묘한 장식.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듯하다. 아니 본다기보다,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다. 오늘 좀 피곤한 걸까... 진석은 이 장소가 무척이나 거북스러워졌다. 도망치고 싶어 졌다. 한 걸음만 떼서 계단을 더 내려가면 도망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섬광, 이 공간이 자꾸만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4. “언니 왜 그런 식으로 찼어?” “그러게. 솔직히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침에 문득, 언제까지 이렇게 지속할 수는 없겠구나. 계속 나만 바라보는 연애는 내가 버틸 수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너무 강하게 들었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고 있었네.” “언니가 그럴 때도 있어요? 근데, 나만 해도 그러겠다. 오빠 워낙 무심하니까.” “한 번만, 한 번만 붙잡았어도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역시 그 사람 안 그러네.” “그 오빠 성격에 그럴 리가 없잖아. 언니, 떠본 거야 그럼?” “아니. 떠본 거 아냐. 근데 그 사람이 붙잡았으면 내가 헤어지려고 아무리 마음먹고 있었어도 내 의지랑 상관없이 풀어졌을 거야. 분명 나는...” “언니가 진짜 노력 많이 했는데, 하나를 못 알아준다 그치.” “나도 그런 사람인 거 알고 만난 거니까, 후회는 안 해. 근데, 내 생각보다 조금 더 힘들었네 연애가.” 단순하게 안다는 것과 현실은 달랐다. 그녀도 그랬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렇기에 진석을 바꿀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사랑이 모든 것을 덮어주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까지는 아니었다. 민영은 운명을 믿는다. 정해진 인연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렇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렇게 쉽게 사람을 갈라놓기도 하는 걸까? 어떤 선택을 했어도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헤어짐을 피할 수는 없었다지만, 만약, 만약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분명 달랐을 텐데... 복잡해진 생각 덕에 민영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언니 원래 오늘 데이트하는 날이었지?” “응. 섬광이라는 카페를 가려고 했어. 그 사람과 닮았어. 그 사람이 좋아할 거 같은 곳이었거든. 잘 어울려, 을지로 느낌이 그 사람이랑은. 분명 싫어하겠지만, 사진도 찍어주려고 했어. 카톡 프사 몇 년째 그거 쓴다고 들었거든 그리고... 그리고...” “.... 마음 비우지는 못했나 봐?” “어? 어... 그치... “ 비운다고...? 비우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민영의 상상 속에 이런 전개는 오늘 아침까지 없었다. 충동은, 충동은 이렇게나 무서웠다. 물론 행복한 연애였다. 같이 이야기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는 그 모든 시간을 민영은 기억했고, 또 아꼈다. 분명 그랬음에도, 아주 가끔, 물리적 거리가 멀지 않음에도 종종 벽과 마주 한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림자처럼 어둡고 커다란 검은 벽의 앞에 선 듯한 그런 기분이... 그리고 그 빈도가 점점 높아져 오기 시작했고, 그러다 순간 민영에게 충동이 일었다. 밝게 빛나는 섬광은 다 타고나면 마지막엔 검은 재만 남아버리는 걸까?
5. 진석은 알고 있었다. 민영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자기를 얼마나 신경 써 주었는지를. 여기는 가고 싶은지, 하기 싫은 것은 없는지, 잠은 잘 자는지, 식사는 거르지 않는지, 항상 먼저 물어봐 주어 고마웠다. 진석은 태생적으로 말이 짧았다. 표현에도 서툴렀다. 살가운 성격이 아니다 보니, 그녀의 힘들어하는 말에도 무덤덤한 반응만 나왔다. 누군가를 배려해준다는 건 그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감정조차 누구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 진석은 타인의 감정을, 설사 그게 애인의 것이라 해도, 쉽게 알아차리지도, 공감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고마워, 사랑해 그런 단순한 단어를 입에서 꺼내는 일도 그에게는 어려웠다. 애쓰고 애쓰다 꺼낸 고맙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매번 시기를 놓쳤다. 부족함을 알기에, 성격을 바꾸지는 못해도 그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단지, 노력은 그녀가 알아챌 만큼 티가 나지 못했을 뿐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했으면 이런 상황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타인을 좋아한다는 일이 얼마만큼의 감정 소모와 배려가 필요한 일인지를, 그는 이제서야 알아가고 있었다.
“형 진정은 좀 돼요?” “뭐냐 이건?” “냅킨, 형 울까 봐서요.” “야이 X발 새끼가.” “농담이에요. 그냥 가져다 놨어요. 물 가져오는 김에 이따 나갈 때 쓰려고.” “보라색이네 꽃이. 걔도 보라색 좋아했어.” “꽃? 아 냅킨에 이거. 올... 그런 것도 기억해요?” “보라색? 그게 왜?” “남 일 기억 하나도 못 하잖아요. 전 여자친구들이 뭐 좋아했는지 기억했던 적 없었으면서... 물론 제가 형이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딱 각이 딱 그런데...” “...” “그런 거 누나는 알아요?” “모르지 나야, 걔가 아는지는.” “그러고 보니까 형, 이 자리에는 왜 앉았어요? 여기 쉐어 테이블이고 딱 봐도 눈에 띄는데, 누나 때문이죠? 누나 음식 사진 찍으니까” “... 그래. 민영이가 이런 테이블 앉아 주로. 그냥 원래 걔랑 보기로 했던 날이잖아. 그래서 걔가 앉을만한 자리 앉은 거야. 그게 어쨌다고.” “뭐야... 형 잘 아네. 누나 뭐 좋아하는지. 사랑꾼이었구만.” “그만해라.” “잡고 싶죠?” “아니, 이미 끝났다고 했잖아.” 완고한 사람은 그릇된 일일지라도 한번 결정 나면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직선적인 삶을 살아온 진석에게 삶은 외길에 가까웠다. 긴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 선택지는 매번 하나, 그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답을 골라도 된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과 그 여러 갈래의 길을 모두 걸을 수 있다는 그런 상상을. “뻥 치지 말아요. 잡고 싶으면서... 또 연락 오기만 기다리게요?” “너 오늘 왜 그래, 자꾸?” 성현은 오늘따라 그에게 더 반항적으로 나왔다. 그 역시도 이런 식의 헤어짐은 당연히 싫었다. 어떻게든 아끼는 둘을 다시 이어주고 싶었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더 단단해질 수 있으니까. 진석도 어렴풋이나마 그의 심정이 느껴져 더 타박하지 못했다. “저는... 형이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형 그런 식이잖아요 원래. 근데, 근데 왜! 이럴 때만 솔직하게 못 해요.” “아니, 다른 거 없어.” “거짓말, 형 전화 걸어요. 다시 시작하자고 말해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해요. 하기 전에 어디 못 가요, 오늘.” “그러시던가, 그럼. 나 간다.” “치, 또 도망가게요?” “...” 도망, 도망이라니? 문고리의 손가락은 여전히 진석을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이곳을 떠날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손가락이 그의 속 내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느낌에 그는 도저히 문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 “ 그렇게 말하는 건가? 그에겐 희미한 음성이 들렸다. 확실한 문장으로 나타낼 순 없지만, 또렷하게 의미가 전달되는 한마디가. 진석은 이 공간에 머물러있다. 원래대로면 민영과 함께 있었어야 할 공간. 반대로 눈을 돌려 안을 바라본다. 손님으로 가득 채워진 카페, 옥색 동그란 조명이 붙어있는 천장, 그 아래 테이블에 그녀가 앉아 있다. 이미지가 그의 눈앞을 채워가기 시작한다. 순간, 뇌리에 한줄기 섬광이 타오른다.
충무로의 카페 겸 와인바 섬광으로 한번 소설을 적어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카페를 소개하는 방법도 있나 보다 하고 봐주셨으면 하네요.
단순하게 뭘 팔고 가게가 어떻다고 적는 방식에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카페라는 공간을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방법이 어떤 걸까 고민하다가 하게 되었는데요.
사실, 언젠가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버킷리스트와 겹쳐져서 도전하게 된 게 컸습니다.
에세이를 쓸 때와 확실히 다르긴 다르다 보니,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고, 힘든 부분도 있었네요. (후자가 좀 컸...)
계속해서 다른 카페, 빵집을 소설로 적어볼 수 있었으면 싶은데 과연 얼마나 가능할지 싶네요.
당연히 나오는 등장인물, 사건 그런 것들은 100% 허구고요. 그저 섬광이라는 공간, 파는 음식들 정도만 실제와 같다고 보시면 될 거에요. 평일에 들렀을 때는 남자 사장님이 계셨는데, 주말에 갔을 때는 여자 사장님(?)께서 주문을 받으시더라고요. 아마 글과 다른 부분이 제법 있을 겁니다.
보시고 섬광이라는 공간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으면 좋겠네요.
제가 느끼고 온 것과 비슷한 것을 느끼실 수도 있고, 다른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을 테니 비교해보시는 것도 재미난 일이겠다 싶고요.
“브레드 라잇터”라는 네이밍은 인스타그램 아이디인 브레드이터(breads_eater)와 라이터(writer)에서 조금씩 따와서 더해보았습니다.
ㅅ을 붙인 게 나름의 포인트라면 포인트랄까요. 주변에 많은 분들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주셔서 감사하게 정할 수 있었네요.
브레드 라잇터로 많은 공간을 소설로 남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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