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든 또 한 명의 인물은 세종입니다. 신륵사는 조선 건국과 더불어 시행한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이 위축되었다가 조선 제4대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오게 되면서 신륵사는 세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되었고,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었습니다. 1472년부터 8개월 동안 신축하고 중수하여 200여 칸의 건물을 완성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지요.
명복을 기원하는 절답게 다른 사찰에 있는 법당이 주로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인 데 비해 신륵사의 법당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입니다. 아미타불은 불교에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끄는 부처로 세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신륵사는 조포사(造泡寺, 제사에 쓰이는 두부 만드는 절)가 되었고 신륵사가 있는 곳 근처의 나루터 이름도 조포나루입니다. 신륵사 일주문을 지나 곧장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강 쪽으로 난 조그만 길을 따라가면 조포나루터 표지석을 볼 수 있습니다. 표지석 옆에 작은 위령비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요. 위령비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신륵사는 예나 지금이나 강가에 있는 절로 유명해서 수많은 관광객이 오고 수학여행단도 옵니다. 1963년 10월 23일 안양시 흥안초등학교 5·6학년 학생과 교사, 학부모 총 158명이 여주 신륵사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귀가하던 오후 2시 50분 무렵입니다. 여주읍 연양리에서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를 건너다니던 조포나루에서 일행을 태운 나룻배가 침몰하여 학생을 포함한 교사·학부모 등 49명(남학생 15명, 여학생 22명, 교장을 포함한 학부모 12명)이 익사하는 대형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이날의 사건을 보도한 경향신문 10월 24일 자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숨진 아이들 사연이 가슴을 저몄다. 엄마 아빠를 졸라 햅쌀을 판 돈으로 여비를 마련한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한 소녀의 주검은 배낭을 멘 상태였다. 배낭 속에는 동생에게 줄 캐러멜 몇 개와 사과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참사 원인은 정원 2배 초과, 나룻배를 밀어주던 모터보트의 과속 등 어이없는 것들이었다. 국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컸지만, 당국의 반성과 대책은 시늉뿐이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세월호가 겹쳐서 떠오릅니다. ‘기억되지 않는 참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는 기억의 학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무엇을 기억하기를 원하는가?’ 늘 고민이 많습니다. 이곳 신륵사에서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위로했을 나옹선사와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백성을 위한 정책을 고민했던 세종대왕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남의 아픔을 모른 척하지 않았던 그분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남겨진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여주 8경 중 하나가 신륵모종, 즉 신륵사의 저녁 종소리입니다. 언젠가 늦은 시간까지 신륵사에 머물며 강월헌에 앉아 종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용히 반복되는 그 종소리가 왠지 모르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경험을 했습니다. 범종 소리는 고통받는 중생들이 종소리를 듣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한다고 합니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재난과 참사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과 고통받는 가족들 모두에게 그 종소리가 전해지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