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 일행은 이후에 강원도 산간지대를 숨어 다녔지만 결국 원주에서 체포되고 배편으로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압송됩니다. 그의 재판은 우리 역사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최시형을 재판한 재판관 중에는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 한 계기를 만든 장본인 고부군수 조병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쫓겨난 그가 다시 권력의 자리에 돌아와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상황을 생각하면 기가막힐 뿐입니다. 재판은 1898년 5월 11일부터 시작되어 5월 30일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급하게 마무리되었고, 6월 2일 결국 형이 집행됩니다.
최시형의 시체는 광희문 밖에 버려지게 되어있어, 당시 육군법원 형장 뒤뜰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나마 최시형의 측근이자 경기도 광주의 동학 지도자인 이종훈이 상여꾼을 사서 야밤에 시신을 수습해 동학교도인 이상하의 송파 뒷산에 최시형의 유해가 안장되게 됩니다. 그러나 2년 후인 1900년 3월 이상하가 이종훈에게 동네 사람들이 관의 지목을 두려워하니 이장을 해달라고 요구하자, 이장할 곳을 물색하다 원적산 아래의 천덕봉이 명당이라 하여 그곳으로 최시형의 유해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최시형 묘가 이런 이유로 여주에 자리 잡게 되었지요. 최시형의 시신도 피난처를 찾아 결국 여주로 온 것입니다.
20여 년 전 여주에서 이곳을 찾을 때 한참을 찾아 헤맨 것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안내 표지판과 잘 되어있고 정비가 되어있고 이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들이 첩첩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고단한 삶을 살다가 간 그분이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는 거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학과 함께 근대 역사에서 박해받았던 종교는 천주교입니다. 여주 강천면 부평1리 ‘부엉골’ 또는 ‘범골’이라 불리는 골짜기는 박해 초기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몰려 들어와 형성된 피난처입니다. 세종천문대 옆으로 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가면 갑자기 너른 들판이 펼쳐지게 되고 안내 표지판이 나옵니다.
표지판을 따라 계곡을 올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처럼 보이는 굴이나 돌무더기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험한 곳에서 살 수 있었을까 싶은데 옆에 작은 계곡물이 흘러가 그나마 살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 볼 뿐입니다.
교우촌인 이곳(강천면 부평리 581번지)에 1885년(고종 22) 10월 28일 ‘예수성심 신학교’가 세워지게 됩니다. 교사(校舍)와 사제관 겸 성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오두막 두 채의 단출한 건물에 학생은 7명이 전부였지만, 이 작은 신학교가 이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모태가 됩니다. 외진 곳인 데다 학생 수도 적어 결국 2년이 채 안 지나 1887년 3월에 신학교는 서울 용산(원효로4가 1번지)으로 이전하고, 신자들도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점차 교우촌의 흔적이 사라지게 돼버립니다.
부엉골은 그 터조차 잃어버렸다가 다행히 천주교 교회사연구소에 의해 유적지를 확보해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전거론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정비가 되어있지는 않아 찾아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탈리아 지하 묘지 카타콤을 비롯해 수많은 피난처가 이제는 역사 유적이 되어 성지순례 코스가 되기도 하고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기도 합니다. 동학과 천주교는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두곳이 서둘러 역사유적으로 모습을 갖추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올해 초 기회가 되어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피난길을 따라 답사했는데요. 낯선 타국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어 피난다닌 고난의 현장을 확인하는 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힘든 시절에 그들을 도왔던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어 마음이 따뜻해지는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여주의 피난처를 다니면서도 이렇게 험한 산골까지 와야 했던 사람들의 처지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피난처가 있고, 그들을 도왔던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피난처는 외지고 험한 곳이라 찾아가기가 유난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힘든 현장을 찾아가야지만 그들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힘든 처지에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지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학생들과 주변 사람들과 기회가 될 때마다 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