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 발령받아 아는 사람 하나 없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이 아플 때였습니다. 아프고 힘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가족이고 집 아닐까요? 편안하게 쉬고 기대고 응석 부릴 곳이 필요하지요.
우리 조상들도 우환이 있거나 식구들의 안녕을 빌기 위해 멀리 갈 것 없이 마당에 물 한 그릇 떠 놓고 치성을 드렸습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을 보며 기도하기도 하고 돌 하나 얹으며 빌기도 했습니다. 거창한 의식이나 절차가 아닌 편안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댈 곳을 찾았지요. 그래서 동네 곳곳에 이런 공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멋진 성당이나 사찰 건물을 방문하는 것도 좋지만 왠지 동네에 이름 없는 돌탑, 마을 장승, 서낭당, 아무렇게나 조각된 미륵불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런 곳들은 어김없이 전설의 고향처럼 전해지는 이야기 하나쯤은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합니다.
이포에 가게 되면 삼신당에 자주 올라갑니다. 찾는 사람이 없어 조용하고, 소박하고 아담한 건물이 주는 그 느낌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배롱나무꽃과 우거진 숲을 볼 수 있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열린 틈 사이로 강이 보이는 풍경이 좋습니다.
이곳에 삼신당이 자리 잡은 전설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이 마을은 강원도 뗏목이 여울물을 돌다가 파선되어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마마가 마을을 휩쓰는 바람에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는 등 재난과 병마가 끊이지 않아 살기가 어려웠다고 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촌장의 꿈에 도인이 나타나 “어느 산속에 가면 초가집이 한 채 있는데 초가집 안에 세 노인이 있을 것이니 그 노인들에게 사연을 말씀드리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꿈을 깬 촌장이 기이하게 여겨 일러준 곳에 가보니 정말 초가집이 한 채 있었고 세 노인이 담소를 즐기고 있었지요. 촌장이 무릎을 꿇고 마을이 처한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자 세 노인은 기꺼이 가서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곧장 이 마을로 돌아와 그 세 노인을 모시자 마을에 재난과 병마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세 노인이 바로 삼신(산신, 성황신, 용왕신)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삼신을 모신 집을 마련하고 마을의 평안과 함께 뱃길의 무탈함을 빌기 위해 제를 지내게 되었던 거죠. 태종실록(태종 12년 9월14일)에는 내시별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규모와 역사성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이포나루가 크게 번성했을 때는 용왕굿을 하면 선주들이 비용을 부담했고, 이포나루에는 광나루를 거쳐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배들이 쭉 길게 늘어설 정도였습니다. 또한 일주일가량 이어지는 당굿과 줄타기하는 광대들을 보려고 많은 사람이 몰려 그 인파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마을에 질병이 많아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전설은 강천면 적금리에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강천면 적금리는 조선 초기 이 마을 일대에서 금을 모아두었기 때문에 적금(積金)이라고 하였으나, 언제부터인지 마을에 질병이 많아 장승을 세워서 재앙을 막았다고 해서 붉을 적자를 써서 적금(赤今)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 이름이 바뀐 사연은 이렇습니다.
마을로부터 뚝 떨어져서 작은 산이 하나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산을 ‘딴동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딴동산은 합천 이씨 소유여서 집안에서 상(喪)이 나자 이곳에 묘소를 그곳에 쓰게 되었지요. 그런데 상중(喪中)의 어느 날 남루한 모양새를 한 사람이 찾아와서는 상주(喪主)를 만나기를 청합니다. 그는 “땅을 파 보면 돌이 나올 것이오. 그 돌을 절대로 꺼내지 말고 그 위에 관을 얹어서 묘소를 만드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상주로서는 돌 위에 관을 얹어놓은 채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묘를 쓸 수는 없으므로, 돌을 들어내고서 묘를 쓰겠노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관을 묻기 위해 땅을 파보니 정말 그 사람의 말대로 커다란 돌이 나왔고, 상주는 돌을 파내려고 땅을 파게 됩니다. 그 순간 돌 밑에서 밝은 빛을 발하는, 금두꺼비 같은 것이 하얀 연기를 피우면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묘를 쓴 그해부터 적금 2리에는 돌림병이 돌기 시작했고, 이 병으로 말미암아 마을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마을 노인들이 용하다는 어느 절의 스님을 찾아가서 마을에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를 물어봅니다. 그 스님은 마을을 한번 살펴보더니, 딴동산에 묘를 써서 마을에 돌림병이 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남의 산소를 파낼 수도 없는 일이니, 딴동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줄 테니 그곳에 장승을 세우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면 그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정월 열나흘 밤 장승 고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고사를 지내자 그 뒤로는 마을에 돌림병이 사라지고 무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스님이 일러주었던 자리가 바로 현재 장승이 서 있는 곳이고, 적금 2리의 장승제는 그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장승은 2년에 한 번씩 새로 만들어 세우는데 제주(祭主)로 선정된 사람이 산에서 새집이 없고 갈라지지 않은 나무를 골라 장승 만들 재목을 정하고, 열나흘 낮에 제주 집에서 목수로 하여금 깎아 만들게 합니다. 장승을 새로 세우게 되면 기존에 있던 장승은 제주가 술을 떠 놓고 뽑아버리는데, 뽑은 장승은 서 있던 자리 뒤편에 눕혀놔 썩게 놔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매번 장승을 깎아 세우는게 번거로워 돌로 장승을 만들어 세워놓았습니다. 예전 나무 모양의 사진을 비교해 보니 돌로 만든 장승은 왠지 조금은 다가가기 힘든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하면 혼날 거 같습니다. 이런 장승은 정교함보다는 쓱쓱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옛 모양이 더 정겹게 느껴집니다. 장승 조각이 변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마을 공동체를 위한 의식이 남아 있다는 것은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