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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by 강혜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십중팔구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부담스럽지 않을 만한 화제를 꺼내 상대를 말하게 만들고, 적절한 리액션을 섞어 가며 가벼운 이야기를 이어 가는 것이 나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가끔은 교사가 아니라 MC가 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일까. 주변 사람들은 내가 사람 사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인 줄 안다. 누구를 만나도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친해진다’는 단어를 한 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나에게 ‘친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좋아하고 아낀다는 의미를 넘어 ‘편안하다’는 감정이 포함된 말이다. 좋아하는 것과 편안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편안해지기까지 유독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한다.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나는 늘 내 생각과 말을 검열하며 신중하게 내뱉었다. 상대가 혹시 불편하지는 않을까, 내 말을 오해하지는 않을까, 너무 무례하게 들리진 않을까, 이야기의 주제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하면서 나의 표정이 어떻게 보일지, 몸짓이 어색하지는 않은지, 목소리가 크거나 작지는 않은지, 내가 혹시 재미없지는 않은지. 잠깐 대화하면서도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하고, 내 모습을 의식하느라 애를 썼다.


얼마 전, 〈감정의 이해〉라는 책에서 희·노·애·락 같은 기본적인 감정 말고, 조금 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접했다. 함께 읽던 이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이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감정으로 ‘말루’를 선택했다. 말루(malu)는 인도네시아어로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당황하는 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친하지 않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데, 상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예상할 수 없어 불편하고 당황스러워하는 나의 모습이 ‘말루’와 비슷한 감정 같았다. 딱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말루’는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당황하는 감정이지만, 나는 ‘편안하지 않은 모든 사람 앞에서’ 당황한다는 점이다.

두 달에 한 번 정수기 점검하러 오시는 분이 우리 집에 오는 날이면, 예약된 날짜를 기다리며 며칠 동안 고민을 했다. 무슨 말을 건넬지, 어떤 음료를 드릴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할지, 아니면 편안하도록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할지. 아주 사소하고 불필요하기 짝이 없는 것들까지 사서 걱정했다. 나의 불편한 감정은, 심지어 나와 아무런 친밀도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과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화 〈기생충〉을 처음 봤을 때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스크린 속 인물들이 자각하지 못했던, 그러나 끝내 감춰지지 않았던 ‘냄새’—가난한 자의 몸에서만 날 것 같았던 결핍에 찌든 냄새가 내 몸에서도 나는 것 같아 이상하게도 숨이 막혔다. 사회의 중심이 아니라 늘 주변부에서 살아왔던 나는 집 현관문을 열 때마다 풍겨오던 냄새가, 그런 냄새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살던 내 몸에 이미 배어있는 듯했다.


주변 사람의 눈치를 보는 건 나의 생존방식이었다.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환경. 사회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공기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걸, 청각장애가 있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자연스레 배웠다. 누군가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의 높낮이를 살피는 일은 나에게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늘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내가 그어 놓은 선 안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오면, 나는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기 바빴다. 그저 가벼운 인사와 웃음, 날씨 이야기 정도가 관계의 전부였다. 주말에 함께 쇼핑을 가자거나 여행을 가자는 제안에는 자연스레 핑계를 댔다. 가까이 다가와 팔짱을 끼려는 순간, 본능적으로 얼어붙었다. 손가락질받지 않을 만큼의 친절과 예의, 그러나 결코 손 닿을 만큼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 그것이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잘 보이고 싶을수록 더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 그것이 내 인간관계의 적정선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기까지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아직 마음이 편해지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 그리고 그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나에게 편안한 관계가 되기까지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차피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 아등바등 살면서 인생을 소모하기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임을 가족의 죽음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저렇게 하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며 남의 시선을 의식하던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남들 비위를 맞추느라 내 기호를 무시하는 삶을 멈췄다. 실실 웃으며 싫은 소리 안 하던 나는 각종 모임의 총무를 자주 맡았는데, 그런 나에게 가장 어려운 건 모임 장소를 정하는 일이었다. 각기 다른 입맛을 가진 여러 명의 취향을 모두 고려해 만족시키려다 보니, 식당을 섭외하는 데 며칠이 걸리곤 했다. 음식의 맛과 가격, 모임 구성원의 입맛과 교통편, 주차시설까지. 완벽한 식당을 찾으려다 보면 모임을 하기도 전에 지칠 때가 많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꼭 불만인 사람이 하나씩은 있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냥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장소가 불만스럽다는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그런 소리가 나오면, 자기가 총무를 하라며 통장과 카드를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여러 번 머릿속으로 통장 집어던지는 장면을 시뮬레이션해 봤다. 그랬더니 “이 집 별로네.” 하는 반응에도 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런 말이 나올까 봐 머릿속으로 총무 자리를 내던지는 상상을 해 봤다는 우스갯소리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애쓰던 생활에서 벗어나니,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진심으로 즐겁고 편안하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바쁘게 살기로 했다. 주어진 일을 처리하고 내 역할에 충실히 살다 보면 주변 사람의 시선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시간을 분, 초 단위로 쪼개 악착같이 살기 위해 매일 아침 다이어리에 하루 계획을 세운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고, 매일 밤 잠들기 전에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는 않았는지 하루를 돌아보며 반성한다. 그리고 그날 품었던 감정을 정리해 몇 줄 글로 남긴다.

시간을 관리해 나가며 깨달은 점이 있다. 내 삶에 집중하는 것이 참 기분 좋은 일이구나. 이제부터는 내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들에만 집중해야겠구나. 나의 가치를 높여 주는 것은 타인에게 잘 보이고자 했던 노력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고자 한 태도 덕분이라는 것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아침 첫 루틴으로 명상을 실천했다. 매일 자고 일어나 호흡에 집중하며 밖을 향하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렸다. 어깨와 목의 긴장을 풀고 몸을 이완한 상태로, 흩어지는 생각을 다시 호흡으로 되돌리는 일은 뇌의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예민하고 까칠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을 별것 아닌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초연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스트레스를 받고도 남을 일들을 웃으며 해결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 여길 수 있게 된 것도 명상을 시작한 뒤부터였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여길까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에 초점을 두는 것. 그렇게 나의 삶에 집중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나를 성장시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러자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 나에게 이런 장점도 있었지. 나,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그것이 바로 내가 사람들과 진심으로 ‘친해질 수 있는’ 비결이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바로 ‘나’임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인 덕분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나’.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거든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잘 보이는 방법, ‘나’를 최우선으로 챙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려 한다. 그것이 선행되어야만 좋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지내는, 재미있는 인생을 누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ChatGPT Image 2025년 10월 13일 오전 07_06_15.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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