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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원 Jun 27. 2024

부활, 레프 톨스토이



인간이 세운 정의 속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불합리성. 법은 필요하다. 우리는 저마다 이해타산적이고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공공선이 필요하다. '자신의 쾌락만을 소중히 하는 방탕하고 세련된 에고이스트였다', '이 사람의 모든 것은 자신이 처한 생활 조건으로 결정되었으며' 나의 존재와 정신. 

톨스토이는 가벼운 즐거움을 경계했다. 인간의 죄성에 물음을 던지라고 한다. 우리는 타인을 불쌍히 여길 순 있으나 참견하진 않는다. 우리는 오락과 유흥을 추구하고 싶지 사랑과 연민엔 용기와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건 단지 어리석은 확신이다. 네흘류도프가 카츄사와 정을 나눈 것처럼 동물로 살겠다는 다짐 밖에 안 된다.

 '그런 인간들을 낳는 조건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저 그들을 양산하는 시설을 장려할 뿐이야. (중략)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장려하고 조절해. (중략) 한 사람을 붙잡고 나서 상상하지.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스스로를 지켰다고.' 우리의 선량함은 얼마나 안일한가. 어쩌면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 베푼 음흉한 속임수였을지도. 윤곽이 흐릿하다.

 '모두가 서로에게 악을 행하고 괴로움을 겪는지 의문이 든다 해도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울적해지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면 되고. 무엇보다 남자와 사랑을 나누면 된다. 그러면 지나간다.' 우리는 '선'을 베푼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만든 것이다. 그래봤자 평범한 죄인인데 말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개념을 인정해 주는 인간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밟고 있는 땅을 진흙탕이다.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은 자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처지에 따라 선악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다면 그건 이미 우리가 악한 성질을 가졌다는 걸 보여준다. 

자신의 타락을 자랑하는 시대. 왜곡된 신. 사연은 많으나 어디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 긍휼을 베푸실 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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