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 스스로를 대견해할 것
저를 사랑해 주는 열혈팬이 생겼습니다. 출입문 여는 소리에 아이들이 현관문까지 뛰어나와서 맞아줍니다. 절대적인 내편이 있다는 것, 조건 없는 환대, 나라는 존재만으로 수용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나의 마흔에게, 전안나 지음 -
아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붉은 입술이 더 붉어진 것만 같다. 결국은 딸꾹질까지 하신다.
'딸꾹딸꾹!!'
"아빠 괜찮아? 물 좀 줄까?"
"좀 맵네~ 괜찮아~"
한입 베어 먹은 고추에서 코끝을 찌르는 매운 냄새가 났다. '도대체 어른들은 이런 걸 왜 먹는 거야?' 그 맛을 상상만 해도 입안이 아린 듯하다. '이 정도는 맛있다고 끄덕 없이 먹을 수 있어야 어른이 되는 걸까?'
내 눈에 어른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밤늦게까지 돌아다닐 수도 있고 화장도 할 수 있다. 머리 나빠진다고 못 먹게 했던 박카스랑 커피도 마실 수 있다. 빨리 어른이 되어서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엄마, 아기들은 자는 거 아니면 우는 거밖에 할 줄 몰라?"
"맨 정신으로 가만히 있는 시간은 없는 거야??"
막상 '내가 어른이 된 건가?' 느꼈던 순간의 기억은 이랬다. 도무지 잠을 자지 않는 아기 때문에 나 또한 밤을 꼬박 새웠다. 잠을 못 자는 것까진 그렇다 쳐도 목이 쉬도록 쉼 없이 울고 있으니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남편이 비닐봉지를 비비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 백색소음을 들려주면 진정이 되기도 한다는데 우리 아기한테는 어쩐지 그 방법도 잘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나는 엄마니까. 나는 이제 어른이니까.
시큰거리는 양쪽 손목에는 연보라색의 짱짱한 보호대가 있다. '너를 책임져주마' 자신 있게 외쳤지만 사실 내 육아 지식은 책으로 배운 게 전부다. 육아가 정확히 어떤 건지, 내 일과가 어떻게 바뀌는 건지 아무도 자세하게 말해 준 사람이 없었다. '아이 낳으면 힘들 텐데' , '임신했을 때가 제일 좋을 때야~' , '조리원에 있을 때 푹 자둬'이 정도 말로는 그 속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너도 곧 당해봐라 이건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거야 반갑다 육아동지여!ㅋㅋㅋ' 속으로 잔뜩 고소해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따져 묻고 싶다. 아기만 낳으면 사랑이 마구 샘솟고,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면서 산책도 하고, 뭐 그런 행복한 인생이 시작되는 거 아니었냐고!!
아이를 낳는다는 건,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였다.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고 싸고 싶을 때 쌀 수 없었다. 라면만 끓이면 우는 아이 때문에 탱탱한 면발은커녕 우동이 되기 전에 먹는 걸 감사해야 했다. 그놈의 분리불안인지 뭔지 때문에 화장실 문을 열고 볼 일을 보는 대환장 인생이 막을 열었다. 수유를 하다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때면 수치스러움보다 아기가 잘 자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다. 내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아이를 낳고 나서야 온몸으로 아주 뜨겁게 알아버렸다.
아이 등에는 센서가 하나 달려있었다. 잘 자다가도 눕히기만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마법의 등센서. 아마 다른 집 아기들도 등에 하나씩은 장착하고 있었으리라. '지금 깨는 건 반칙이야, 아직 30분도 안 잤는데!' 아이를 품에 안고 내가 아는 모든 동요를 불러주니 겨우 다시 잠에 든다. 사방이 막혀있는 포근한 침대에 고도의 기술로 내려놓는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나오는 것 까지도 성공.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도 잘 닫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그 순간 '날 두고 어딜 가는 거야?' 하는 듯 날카롭게 엄마를 찾는 딸.
'오늘도 편히 밥 먹긴 글렀네'
힘차게 모유를 삼키는 모습에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변모양 하나에도 울고 웃었다. 모양이 예쁜 날에는 사진을 찍어 남편과 공유하면서 키득거렸다. 자식 낳으니 똥까지 귀엽냐며 혀를 쯧쯧 차시던 엄마에게 송편같이 너무 예쁘다고 활짝 웃었다. 아이 때문에 처음 울었던 게 예방접종 시킬 때였고 두 번째가 이유식 시작하고서 변비에 걸렸을 때였으니 똥 때문에 울고 웃었다는 건 정말 모두 사실이다.
뚱뚱한 가방을 둘러메고 아기를 안고 갔던 문화센터, 잠들지 않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동네를 빙빙 돌았던 수많은 밤들. 처음으로 열이 났던 날, 물티슈 한통을 모조리 뽑아 재꼈던 날, 엄마라고 어렴풋이 말했던 날, 처음 식판에 밥을 주던 날.. 매일이 특별했고 우리에겐 기념일이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내야 한다는 게 마치 사명감이 된 것처럼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맞추며 살았다. 그래서 후회하냐고?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목숨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는 건 다른 어떤 경험으로도 대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가끔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상상해 볼 때가 있다. 결혼은 절대 하지 않을 거고 여행이나 실컷 다녀야지 생각했는데 '그럼 우리 아이들은?' 떠올리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우리 아이들을 만날 수 없는 20대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물론 같은 남자와 또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건 조금 망설여지지만.
매운 닭발을 잘 먹고 돈 좀 번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아이가 없어도 어른스럽게 잘 사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확실하다. 남편을 만난 뒤 사람이 됐고 아이를 낳고 어른이 됐다.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부부의 삶도 많이 궁금하다. 하지만 이번생에서는 내 팔자에 만족하려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내 편인 두 딸이 있기에 힘들지만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게임은 아직 뒤에 남아있다. 곧 다가올 사춘기를 준비해야만 한다. 엄마가 자주 하셨던 말씀이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였는데. 엄마한테 좀 더 잘할걸 이제 와서 후회하면 너무 늦은 걸까.
누구나 엄마가 될 수는 있지만 엄마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그 작디작은 아이를 이만큼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게 아닐까?
어른이 되느라 애써온 나에게 칭찬을 듬뿍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