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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U Tris Aug 22. 2024

잉크

그림

 깃펜의 촉, 그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잉크 한 방울. 하얀 종이 위 생기는 검은 곰팡이. 나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저 점은, 나의 의지로 찍어낸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의 의지로 가만히 냅둔 깃펜에서 흘러내려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저 점에는 내 의지가 담겨 있을까?

 나는 깃펜을 내려 검은 점 위에 촉을 댄다. 서서히 팔 전체를 움직여 선을 긋는다. 종이의 바다 위 새겨지는 잉크의 파도. 물결이 일렁이며 나는 그림을 그려나간다.

 선과 선이 만나다보면 면이 생긴다. 그것은 둥근 모양인 경우가 많으나, 때로는 날카로운 꼭짓점을 가진 형태가 되기도 한다. 때론 선을 그대로 냅둬 선 자체로 도형이 되게 하기도 한다. 그것은 세계의 불완전성에 기인한 현상이다. 기하학의 세계, 이상적 세계에서 선은 그저 선이다. 한없이 얇은 선은 도형을 대신할 수 없다. 면이 아니기에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잉크로 긋는 선은 결코 선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한 없이 얇지 않다. 그것은 확실하게 두께가 있으며 도형이라고 불려 마땅하다. 이 세계에서는 어쩌면 선을 그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선이라고 부르며 그은 것은 선이 아니기에, 내가 의도하여 한 행위는 결코 그 의도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세계가 그것을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할 것이다.


 학원이 끝나는, 학생이 독서실에서 나오는 10시에 그녀의 독서실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나는 떠 있는 깃펜에서 흘러내리는 잉크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나의 독서실이 그곳 근처였고, 나는 그저 잠시 나왔다가 그녀에게 다가가지는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건물에서 나오다가 나를 발견한다면,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걸거나 내가 주는 눈빛에 반응을 한다면, 그때 나에게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는 의지가 충만했던 것일까? 잉크는 깃펜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 또한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이 모든 상황에는 내 의지가 확연히 담겨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딱히 알 필요가 없다. 그저 사랑을 할 때, 확고한 의지가 필요한지, 사랑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확연한 의도가 깃들린 무언가가 필요한지 궁금했을 뿐이다.


 의도한 행위가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실 더 중요한 것이다. 의도한대로 되지 않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현상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예측에는 한계가 있기에 어떠한 것을 계획하는 것은 힘든 작업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수준 낮은 의도한대로 되지 않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서 선이 도형이된다는 것은 세계 단위의 부정이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민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녀와 마주치는 순간이 오면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그런 사건이 몇차례 쌓이다보면 자연스럽게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서로에 대한 어색함을 지워내는 작업을 의도하며 인사를 건넸다.

 돌아온 것은 무반응. 자신에게 인사를 한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애초에 나는 남이라는듯.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제대로 대화를 해본 것이 2년 전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저 내 예측 능력이 떨어져서, 현재 내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여길 것이다. 내가 몇 번 더 확실하게 인사하면 되는 그런 단순한 상황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나의 마음 속에서는 그것은 확실한 세계 단위의 부정이었다. 마치 나는 절대로 그녀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그런 부정.


 잉크에 깃펜을 찍는다. 가볍게 털어내고 다시 선을 긋는다. 깔끔한 곡선을 마지막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잉크로 그려낸 그녀의 얼굴을 들어서 벽에 붙인다. 이제 대략 40장. 40개의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의지가 무슨 의미인가, 의도가 무슨 말일까. 나의 의지는 이렇게 벽에 붙어 어디로든 가지 못하는데. 그녀에게 닿을 생각조차 안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깃펜을 정리하며 말했다.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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