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다른 세상 Il y a un autre Monde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너만
곁에 있으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불 뒤집어쓰고
들숨날숨 아껴 쉬며
뜬 눈으로 밝히던 숱한 푸른 밤,
마지막 페이지 읽기도 전
새벽 도둑처럼 들이닥치던 여명.
붉은 안광으로
검은 글자 오솔길로 바람처럼 달리며
타작마당 짚더미에 숨어 마신 밀주처럼
독한 책 향기로 몽롱하던 봄날,
하얀 풀꽃에 입맞춤하던 노랑 꿈나비
흔적조차 묘연한 지금.
존재하는 다른 세상,
곱게 단장한 신부처럼
일 년이나 기다리는대도,
무딘 서방처럼
흘깃 곁눈질하며 돌아 앉는다.
여물지 않은 도토리
마구 삼킨 청설모 신트림처럼,
올라오는 어순대로 엮었더니
남의 생각 자투리인지
내 마음 조각인지
신원조차 모호한 언어끼리
억새풀처럼 쉼 없이 서걱댄다.
어릴 적
그 푸른 섬으로 돌아가
먹물로 얼룩진 영혼
맑은 또랑물에 말끔히 씻어내고,
심연바닥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
풀잎 잉크로 한자씩 눌러쓰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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