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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책

존재하는 다른 세상 Il y a un autre Monde

by 글바트로스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너만

곁에 있으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불 뒤집어쓰고

들숨날숨 아껴 쉬며

뜬 눈으로 밝히던 숱한 푸른 밤,

마지막 페이지 읽기도 전

새벽 도둑처럼 들이닥치던 여명.


붉은 안광으로

검은 글자 오솔길로 바람처럼 달리며

타작마당 짚더미에 숨어 마신 밀주처럼

독한 책 향기로 몽롱하던 봄날,

하얀 풀꽃에 입맞춤하던 노랑 꿈나비

흔적조차 묘연한 지금.


존재하는 다른 세상,

곱게 단장한 신부처럼

일 년이나 기다리는대도,

무딘 서방처럼

흘깃 곁눈질하며 돌아 앉는다.


여물지 않은 도토리

마구 삼킨 청설모 신트림처럼,

올라오는 어순대로 엮었더니

남의 생각 자투리인지

내 마음 조각인지

신원조차 모호한 언어끼리

억새풀처럼 쉼 없이 서걱댄다.


어릴 적

그 푸른 섬으로 돌아가

먹물로 얼룩진 영혼

맑은 또랑물에 말끔히 씻어내고,

심연바닥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

풀잎 잉크로 한자씩 눌러쓰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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