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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책의 대전환: 예술 생태계

이제 예술은 정책의 핵심이다

by 성희승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오래도록 이 질문을 품고 살아왔다. 프랑스 루브르에서 전시를 하던 날도, 작가들이 거리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날도,

그 질문은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내게 예술은 삶이었고,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토대는 너무나 자주 부실했다.

K미술연대의 대표로, 국정감사 요청서를 손에 들고 문화체육관광부와 국회를 오가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정책은 철학이고, 철학 없는 정책은 예술을 소모품으로 만든다.

지금, 우리는 문화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해야 한다.

예술을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국가의 비전으로 대우할 수 있는 체계, 예술가를 시민의 감수성을 대변하는 핵심 존재로 보는 인식 전환.

서울 국회 소통관에서 예술가들의 기자회견을 주도하던 그날, 나는 분명히 느꼈다, 예술가는 시대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이들이며, 단지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문화정책은 결국 제도와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감수성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의 문제다.

나는 오랫동안 작품 창작을 하면서 틈틈이 기초예술교육과 예술가 권리 보호를 위해 일해왔다. 갤러리케이 사태에 분노한 수백 명의 작가들이 연대의 손을 잡았고, 그 속에서 나는 문화정책의 전환 없이는 생태계도, 교육도, 창작도 불가능하다는 뼈아픈 사실을 깨달았다. 그 시작은, ‘기초예술’을 정책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1. 문체부만으론 불가능하다 – 협력 없는 생태계는 없다

1-1. ‘문화행정’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오해

기존 문화행정의 한계: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문화행정의 이상처럼 들리는 이 문장은 오히려 무책임과 방임의 변명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예술지원은 ‘전시행정’이 되었고, 예술가는 심사제도와 공모제도 사이에서 소진되었다. 문화예산은 늘었지만, 실질적인 정책 방향과 비전은 부재했다. 지역 문화 정책은 일회성 축제와 전시로 채워졌고, 예술의 본질적 가치보다는 파급력과 흥행성이 우선되었다.

이제는 묻자.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예술을 지원하는가?

문화체육관광부는 많은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일의 범위는 너무 넓고, 예산은 너무 적다. 예술, 문화, 체육, 관광, 콘텐츠, 언론, 종교… 서로 다른 언어와 목표를 가진 영역들이 하나의 부처 아래에 몰려 있다.

그 안에서 예술정책은 늘 가장자리였다. ‘창작자 권리’, ‘기초예술 교육’, ‘지속가능한 창작환경’ 같은

핵심 주제는 뒷전으로 밀렸다.

잘 팔리는 콘텐츠 위주로 예산이 흐르며, 현장 예술가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문화예술’는 왜 국가의 중심정책이 아닌가? 그리고 그 중심에 예술가는 왜 존재하지 않는가?

현재 문화부의 예산은 전체 정부 예산의 1% 미만이다. 이 예산으로 산업미술, 순수예술, 생활문화, 예술교육, 복지까지 모두 담당하기엔 명백히 역부족이다. 문체부 전체 예산으로 좁혀보면 이중 예술 분야는 약 14%에 불과하다. 체육과 콘텐츠 산업이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순수예술과 기초예술은 예산 구조상 ‘취약 영역’이다. 이는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위치에 대한 철학의 부재다.


제안: 예술정책 협력구조 플랜

‘기초예술’을 중심에 둔 융합형 협력 모델이 시급하다.

산업통상자원부: 디자인, 상업미술, 브랜드 아트 등 창의산업 연계

교육부: 예술교육 교과 편성, 예술중점학교 확대

보건복지부: 예술인 복지 안전망 구축 (국민연금, 고용보험 포함)

행정안전부: 지역문화재단 협력 강화, 지방 예산과 연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AI, 우주과학 등 융합형 예술 프로젝트

외교부: 유네스코 등 문화외교 전략화


1-2. 예술은 산업인가, 공공재인가?

“예술은 산업이다, 콘텐츠다, 수출품이다”—익숙한 언어들. 그러나 예술은 공공재다. 모든 국민이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예술을 통해 인간성과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정책은 ‘잘 팔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는 동안 비상업적 창작, 표현의 자유, 예술의 다양성은 설 자리를 잃는다. 예술은 단지 수출품이 아니다. 예술은 공동체의 정신 인프라이며, 미래사회의 감수성이다. 예술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회의 필수조건으로 보는 철학이 필요하다.


2. 예술가의 삶은 정책이다 – 현장의 절박함

지역 문화정책, 생태계로 다시 설계하자

“왜 서울만 예술인가?” 지역 작가들의 질문은 더는 소외된 울림이 아니다.

지방의 예술인들은 단발성 ‘사업 수혜자’가 아니라 창작 생태계의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지속 가능한 창작환경, 생활예술 인프라, 그리고 그 지역에서 살 수 있는 구조다.

나는 수많은 작가들의 절박함을 직접 들었다. 전남의 한 작가는 말했다. “서울에선 전시 하나 하면 기자도 오고 수집가도 와요. 그런데 전남이나 경북에선 스스로 대관하고 포스터도 뿌려요. 전시 끝나도 아무도 오지 않죠. 거긴 아직 ‘예술 생태계’가 없어요.”

지금, 서울과 지역 사이엔 ‘예술 인프라의 양극화’라는 문화 불평등이 존재한다.

예술가가 도시를 재생시킨다

우리는 알고 있다. 예술가들은 폐허가 된 도시를 되살린다. 뉴욕의 소호,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처럼. 서울의 홍대, 성수동처럼.

그러나 도시가 ‘핫플레이스’가 되는 순간, 예술가는 밀려나고 자본이 들어온다.

예술이 도시를 살리고, 도시는 예술가를 내쫓는 구조—이 아이러니를 극복해야 한다. 혹은 이러한 속성을 깊이 이해하고 적극 활용하고 지원해야한다. 예술가가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만드는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3.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의 대오각성

문체부 단독으로 감당할 수 없는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 예술정책은 국가전략 정책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관료적이다. 기초예술교육은 교육부 몫이지만, 교육부는 여전히 국영수 중심이다.

AI, 수학, 과학에 예술을 더해야 한다는 말은 많지만, 정작 예술 자체의 가치는 여전히 뒷순위다.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자.

-프랑스: 문화부가 각 부처에 문화담당관 파견

-핀란드: 초등부터 고등까지 ‘창의예술’ 필수교육, 지역예술학교 전국망

-일본: 문부과학성 내 ‘예술청’ 신설 추진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예술을 ‘선택’으로 둘 것인가? 이제는 문화정책이 주류정책이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4. 창작과 과학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최근 KAIST 교수와 물리학자와 협업하고, 천문학자와의 콜라보 무대를 통해 별과 우주를 기반으로 한 예술작업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다시금 확신했다. 예술은 기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트(Art)’의 어원도 ‘테크네(기술)’다.

예술과 과학, 교육과 기술의 융합은 산업적 융합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감성 융합이어야 한다.

AI와 메타버스 시대에 예술은 감성을 넘어 창의적 사고, 문제 해결력, 공감 능력을 길러주는 가장 강력한 미래 학문이다.


5. 부처 간 협력 없이는 ‘문화강국’도 없다

지금의 문화부는 너무 외롭다. 예산은 적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다. 이 구조로는 상상력 있는 정책을 설계할 수 없다. 그래서 역할을 나눠보자.

상업미술과 콘텐츠산업은 산업부

예술교육은 교육부

지역문화는 행안부

복지정책은 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는 가치와 철학을 설계하는 비전 부처로 역할을 재정의해야 한다.

‘칸막이 행정’으로는 예술이 살 수 없다. 통합과 협력의 생태계가 필요하다.


6. 문화정책의 대전환은 철학이다

예술은 단지 결과물이 아니다.

예술은 삶의 방식이며, 사회의 감수성을 만들어내는 공공의 언어다.

문화정책의 대전환은 결국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국민의 감수성을 어디에 둘 것인가 에 대한 철학의 문제다.

그 철학은 ‘기초예술’을 중심에 놓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예술은 결코 주변이 아니다.

이제 예술은 정책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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