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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May 30. 2022

윤 대통령 취임사에 없는 세 가지

스피치라이터의 세상읽기

저는 연설문을 쓰는 스피치라이터입니다. ‘회사에서 글을 쓰는’ 게 직업이다 보니, 10대기업 CEO와 여야 거물 정치인, 주요 부처 장관의 말씀을 일부러 찾아 듣습니다. 지난 5월 10일 있었던, 말씀자료의 최고봉인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의 16분 남짓한 취임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3400자(字)분량의 전문(全文)을 밑줄 그으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는 내내 ‘낯설다’ ‘생경하다’ ‘독특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이전과는 달리 ‘3無’ 즉, 세 가지가 없더라고요. 제가 찾지 못한 것이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1. 제목, 글의 방향과 입장

첫째, 윤석열 대령의 취임사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취임사에 제목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텐데, 글의 구성상 ‘제목이 없는 모든 글’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못한 미완성의 글입니다. 물론 유작(遺作)과 습작(習作)의 경우에는 제목이 없기도 합니다. 어쩌면 제목을 쓰지 않은 그 자체가 정치적 메시지일 수도 있으니, 만약 그런 의도라면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가끔은 “제목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분도 계신데요, 20년 가량 글밥 먹어온 입장에서 볼 때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제목은 글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옵션이나 액세서리가 아니라, 핵심메시지, 첨예한 입장, 미묘한 뉘앙스를 드러내는 글의 핵심요소입니다. 참고로 제18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는 ‘희망의 새시대를 열겠습니다’였고,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는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 제목은 글의 첫인상이자 독자를 대하는 자세다.

#2. 약속과 다, 취임사핵심

둘째, 추측-의지-가능성을 뜻하는 선어말어미 ‘-겠-’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북한문제를 언급하며 “대화의 문을 열어놓겠다”, “담대한 계획을 준비하겠다”고 2회 언급했고, 취임사를 마무리하며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사가 일종의 약속과 다짐, 그리고 미래에 대한 국가운영 청사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지나치게 적은 수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첫째, 둘째, 셋째를 일일이 짚어가며 약속의 표현인 ‘-겠-’을 17회 사용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65회 사용했습니다.    

△ '-겠-'은 말하는 사람의 추측, 의지, 가능성을 나타낸다.

#3. 정확한 개념설명과 명쾌한 논리 

셋째, 현실인식과 국정 추진과제의 ‘구체성’이 잘 안 보입니다. 추상적 표현과 다들 대충 아는 원론적 이야취임사 내내 뱅뱅 돕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실 거라 믿지만, 이런 스피치는 언제든 말을 바꾸고 발 빼기에 딱 습니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은 국내외 문제의 원인이 바로 ‘반지성주의’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팬데믹, 식량위기, 분쟁, 공동체 갈등과 양극화, 초저성장, 실업 등 수많은 위기를 유발하는 핵심 원인”이 ‘합리적 근거없이 상대를 경멸하거나 의심하는 행동 또는 얕보는 경향’을 뜻하는‘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라는 말입니다. 별다른 설명없이 적어놓은 이 표현때문에 우려했던 대로 여야는 서로를 ‘반지성’으로 몰아세우느라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특히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35회 언급하는데요 “자유는 국내외 위기를 해결하는 보편적 가치여서, 자유를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야기합니다. 대충 봐도 뻔한 소리고, 자세히 보면 동어입니다. ‘자유’의 해석 차이가 논란을 부를  자명요.

△ 미국 역사가 호프스태터가 처음 언급한 용어 '반지성주의'

정치적 언어는 여야를 막론하고 늘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대통령 취임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에 안 보이는 세 가지가 ‘전략적 모호성’과 ‘의도된 파격’인 것인지, 아니면 ‘미숙한 경험’과 ‘단순한 실수’로 비롯된 것인지는 저같은 사람이 알 수 없고, 자세히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취임사로 국민을 편가르기 해서는 안 되고, 정치적 반대편에 선 사람들까지 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취임사는 대통령의 데뷔곡입니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국민 모두를 위한 것이어하고, 글이 꼭 화려할 필요는 없지만 쉽고 정확해야 합니다. 그리고 취임사를 잘 썼다고 정권재창출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5년간 일을 잘해야 합니다.

△ 취임사는 대통령의 평소 생각은 물론, 국정운영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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