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일 May 24. 2024

행복은 적립식이 아니다.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를 온전히 포기하고 사는 당신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인생을 돌아보면 항상 순탄치는 않았지만 불행한 기억보다는 행복한 기억이 더 많았었다. 집에서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돈이든 에너지든 아끼지 않고 살아왔었다. 지금 그 돈을 모았다면 꽤 괜찮은 집 한 채를 샀으리라.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돈을 위해 젊음을 모조리 팔지도 않았다.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며 가끔은 무지성으로 질러버리고, 떠나고 싶은 곳이 있으면 떠났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모아주신 돈을 몇 달 만에 노는 데 몽땅 써서 등짝을 맞은 적도 있었다.


 어느 순간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을까 긴가민가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사는 게 맞았다. 늘 순간순간이 행복했기 때문에 지금도 더 행복할 수 있다. 나에게 그런 확신을 더욱 주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가지며 지내고 있는 친구 A 때문이리라.


 어렸을 적부터 친했던 친구 A는 7급 공무원이 목표였다. 그 녀석은 남들 공부할 때 공부하고 놀 때 공부했으며 잘 때도 공부했다. 공부도 좋지만 친했던 친구를 오랫동안 한 번도 못 보는 것은 우리에게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친구들이랑 고등학교 졸업 후 성인이 된 기념으로 첫술을 마신 이후로는 10년 넘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친구 B가 처음으로 사귄 여자 친구한테 차이고 나서 질질 짜는 것을 놀릴 때도 녀석은 거기에 없었다. 클럽 입장 가능한 나이가 되어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키득 키득거리며 좋다고 줄을 섰을 때도 아마 도서관에 있었지 싶다. 대학 졸업 후 취업난 때문에 다들 갈팡질팡하며 하루가 멀다고 술 퍼마시며 신세 한탄할 때도 시종일관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러다 녀석이 드디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우리는 진심으로 기뻤다. 오랜 기간 고생한 녀석이 빛을 본 게 기쁜건지 아니면 드디어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신났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게 시험에 합격한 녀석이 합격 턱은 고사하고 바로 준비했던 것은 돈 모으기였다. 좋은 집을 사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정말로 꼬박꼬박 돈을 모았다. 잠시 살 집은 발령지와 가까운 곳에 값싼 원룸을 잡았다. 돈을 아끼기 위해 차는 사지 않고 걸어 다녔고, 배달 음식은 한 번 시키면 소분해서 아침 점심 저녁 같은 메뉴를 먹었다. 공무원 합격 후 그 녀석이 1년 동안 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내가 공무원 합격하게 되면 소개팅이 줄지어 들어올걸?"


 하지만 공무원이란 직업을 보고 누군가가 만나주기를 바라는 마음과는 달리 녀석은 속히 요즘 말로 퐁퐁남을 경계했다. 이유 없이 예쁜 여자가 오면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유감인지 다행인지 삼십 넘도록 모태 솔로인 녀석과 예쁜 여자와의 인연을 닿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쓸쓸한 9평대 원룸 안에서 녀석은 스스로의 꿈인지 뭔지 모를 것을 키우며 살아갔다.


 술자리에서 결혼 정보업체 회사를 알아보라는 친구C의 말에 발끈해서 한 바탕 싸운 뒤 녀석은 갑작스레 독신주의를 선언했다. 지금 스스로가 행복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말에 더 이상 반박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의 뜻을 이해시키기에 주구장창 독방에서 공부만 한 그 친구와 우리의 거리감은 너무나 커져 버렸다.


 지금도 가끔은 연락하고 만나며 지낸다. 그래도 제법 상태는 호전되어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인연이 닿으면..." 같은 소리를 하고는 한다. 우리 모두 그 친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한다는 것. 아버지 어머니 세대에는 일정 부분 맞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돈으로 일정 부분 살 수 있는데 그때는 복리가 쌨다. 행복을 적립하면 이자가 아쉽지 않을 정도로 붙어서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취업도 돈 모으기도 무엇 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다. 하나에만 몰두하다 보면 잃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단지,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를 포기하고 있다면, 현재도 과거에는 찬란하기를 바랐던 미래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무엇을 준비하든 간에 숨 한 번 돌릴 여유는 가지고 살자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도 미래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행복은 적립식이 아니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