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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handhan May 22. 2024

동물이 나타났다

02 요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고양이를 주제로 전시가 열렸다. <요물, 우리를 홀린 고양이>라는 제목의 전시. 타이포그래피에서도 뭔가 마술적인 힘이 느껴지는 포스터를 보면서 내가 처음 고양이를 학대하는 주민과 맞대응했던 기억이 떠올라 전시 제목에 더 이끌렸던 것 같다. 

확실히 SNS를 보면 동물 중에 고양이 관련 정보나 이미지는 넘쳐나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다. 이 시대에 인간을 홀리고 있는 동물 중 하나임은 분명해 보인다. 


길에서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다가 지나가는 주민이 먹이를 먹고 있는 고양이에게 다가가 땅에 발을 구르며 고양이를 위협한 일이 있었다. 고양이가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자신을 놀라게 한 것도 아닌데, 사료를 먹고 있는 고양이에게 다가가 못 먹게 위협하는 모습에 황당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주머니, 고양이한테 왜 그러세요? 뭐가 잘 못 되었나요?”

“아니, 고양이는 요물이니까 쫓아낸 거지!”

“네? 요물이요?”


요물이라는 표현에 내 귀를 살짝 의심했다. 요즘 시대에 요물이라니. 어이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으나 웃음을 얼른 지우고 현재 도심 속에서 생활하는 고양이의 처지나 실태를 간략하게 설명드렸다. 몰랐다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 아주머니는 자리를 떴다. 타산지석이라고, 그날의 사건은 사람이 참 습관적으로 살고 언어에 갇힌 존재라는 생각을 했고 내 언어 습관에 대해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인간을 설명하는 말 중에 "습관의 도움 없이 정신이 가진 수단만으로는 우리의 거처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없다"(주1)는 말처럼 잘 들어맞는 말이 또 있을까. 인간은 생각하는 이성적인 존재인 양 스스로를 평가하지만 개개의 삶은 각자의 습관으로 지탱된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동 덕분에 삶의 기본 골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성공담론이나 자기 계발서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 한 시대에 고양이에 대한 오해로 생긴 표현이 강산이 수십 번은 바뀌었을 지금 시대에도 통용될 때는 습관이 아닌 인간의 게으름으로 밖에는 달리 이해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물론 개인은 각자의 삶에 치이는 일이 많으니 대상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거나 자신이 사용하는 말의 습관성을 반성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사회적인 언어 만들기 과정이 필요하다. <요물, 우리를 홀린 고양이> 전시는 고양이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과 역사적 변천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했고, '요물'이라는 말이 쓰이는 맥락을 전환하고자 하는 시도가 보여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수십 년간 인간의 영역에서 인간과의 부대낌을 이겨내는 고양이를 인식해 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대상을 평가하는 일, 언어로 규정하는 일은 항상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 그것은 권력이 만들어지고, 행사되는 장이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요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고양이와 사람 사이의 이해관계를 살펴보는 일이 아니다. 그저 대상을 내 편의로 끌어다 놓고 내가 규정하는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해석하겠다는 폭력이고, 힘의 남용이다.

남자를 꼬시는 여자를 요물이라 했고, 인간이 이성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홀리는 이세계異世界 존재도 요물이었다. 그 말은 언제나 인간 중에서 힘이 없거나, 배제되는 인간이거나, 인간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에게만 붙여지는 말이었다. 그 말을 누군가에게 붙이는 자가 항상 권력의 자리에 있었다. 요물이라는 말이 ‘매력이 있다’는 의미로 전환된다 하더라도 그 말은 ‘나를 나이게 하지 않는 힘’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힘을 가진 자에 대한 두려움이 다수가 되는 순간 요물로 불리는 매력은 더 이상 매력일 없고 해로운 것으로 바뀔 수 있다. 


확고한 ‘자기’라는 환상에 대한 반박은 차치하더라도, 모든 사물은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홀렸다는 것은 홀릴만한 것을 상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나지 상대가 아니다. 예를 들면 고양이의 귀여운 얼굴은 내가 귀엽다고 느끼는 것이지 고양이가 귀여우려고 진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홀린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의, 우리(인간)의 환상이다. 내 환상의 실현과 기쁨의 충족이라는 이익을 위해 우리는 매일 SNS에 고양이의 귀여운 영상을 올리고 공유한다. 요물이라는 말에 고양이를 가두면 이렇게 편하게 우리는 고양이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면 고양이가 생각하는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고양이를 요물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편협한 수준의 지식이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연히 우리(고양이와 인간은)는 각자의 이로움을 증진하기 위한 조건이 맞은 지구의 두 종 species에 지나지 않는다. 


고양이가 인간에게 요물인 만큼 인간도 고양이에게 요물이다. 



주1)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민음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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