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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handhan May 24. 2024

동물이 나타났다

03 당신의 방식은 진화하고 있습니까?

얼마 전 유명 훈련사의 진돗개 혐오논란을 접하며 씁쓸했다. 한편으로는 걱정하던 바가 터져 나오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가 개를 훈련하는 모습에서 개는 단지 훈련의 대상이고 가르치는 것은 복종에 지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나의 우려와는 다르게 온 세상은 그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했고, 내 지인들 조차 그를 칭송했다. 그런 흐름에 대적하지 못한 것은 아직 우리 사회가 동물과 그만큼의 교류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었다. 


동물단체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대규모 번식장에서 구조한 개들 중 일부(약 4~50 마리)를 20평 남짓한 공간에서 돌본 적이 있다. 한 공간에서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니 개들도 서로 스트레스받는 상황이었다. 한 마리가 짓기 시작하면 우후죽순 따라 짓는다. 이웃 주민의 민원 때문에 개들이 짖으면 못 짖게 하는 일이 활동가의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런데 20년 역사를 가졌다는 단체에서 개 수십 마리를 한 공간에 욱여넣듯이 몰아넣고 짖을 때마다 짖음 방지를 위해 한 일이 사료를 무작위로 뿌려주거나, 아니면 주도적으로 짖는 개를 물리적으로 압박하거나, 아니면 목줄을 잡고 들어 올려 강압적으로 제압하는 방식뿐이었다. 대표부터 경력이 오래된 활동가까지 그들 중 누구도 개돌봄에 대한 체계를 만들거나 기준을 마련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름 동물‘권’을 주장하는 단체라고 ‘동물도 지각력 있는 존재’라고 외치며 학대 예방이나 법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구조된 개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체계가 없었다. 


동물단체에서 일할 당시 개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던 탓에 개들을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대체로 먹고, 싸고, 자는 일에만 국한된 돌봄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개들을 지켜보면서 크게 세 무리가 형성됨을 알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인간에게 피력하는 무리, 인간의 행동을 살피며 관계를 저울질하는 무리, 인간을 기피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무리다. 각각의 무리 안에는 여러 품종이 섞여 있었다. 즉 특정 품종이라고 단일한 성격을 갖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무리 안에서도 개체마다 특이성이 나타나는데 적극적인 성향의 개들은 인간의 관심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자주 싸우는 경향을 보였고, 중간 무리는 이런 소위 나대는 개들이 피곤하다면 소란을 일으키는 개체들에게 항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소극적인 개들은 이 모든 소란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듯 둘씩 짝지어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동물도 인간처럼 지각력이 있고 쾌고 감수능력이 있다. 문제는 이 말의 의미를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각력이 있고 쾌락과 고통에 대한 이해가 있다는 것은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에 대한 이해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그에 필요한 행동방식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동물도 사람처럼 종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개체가 갖는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동물단체와 그 훈련사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개체가 가진 역량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종 특성에만 맞춰 돌보고 훈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특정 종의 개에게서 보이는 전반적인 특성을 본능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돌봄이나 훈련의 결과는 단 하나다. 위계적인 관계. 인간이 주인이고 동물은 복종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서 대중에게는 반려동물이라고 칭한다. 어떤 반려의 관계가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란 말인가. 


우선 종의 특성, 즉 본능적인 것과 개체의 특성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새를 예로 들면, 새의 연구에서 진화의 특이점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바로 도시에 적응한 새들의 변화를 탐구하는 것이다. 도시의 새들은 야생의 새들과는 다른 환경조건에서 살고 있다. 그에 적응하기 위해 몇 세대 만에 변화된 점이 있는지 확인하는 연구에서 날개깃 모양의 변화를 발견했다. 새가 날기 위해 가진 모든 능력은 본능이고 날기 위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야생이 아닌 도시 환경에 적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대개의 도시는 야생보다 너그러운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새들은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지 않고 먹이 활동을 이어가고 사람에 대한 경계가 낮은 경향을 보인다. 그런만큼 비행하는데 있어서 야생에서처럼 비행하는 일이 줄어들고 땅에서 먹이 활동을 하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그런데 야생에 버금가는 위험 요소가 나타났다. 바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이는 사고다. 자동차 충돌 사고는 개체의 성향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위험 요소다. 자동차를 피하는 일은 새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했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날개 끝이 원래 모양보다 더 둥글어지는 변화를 단 몇 세대만에 보인 것이다. 날개 끝이 둥글어지면 공기를 가르는 것보다 몸을 수직으로 띄우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하기 위해 더 빠르게 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몸을 띄워 올려 자동차를 피하는 방식을 취하다 보니 날개 끝이 둥글어지는 변화를 격게 된 것이다. 자동차가 도시의 주요한 동물로 나타나고, 환경 변화의 중요한 매체로 고정되자 도시의 새들에게도 전반적인 영향을 미쳤다. 본능의 고정값은 환경의 변화율에 달려있다.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대개의 동물 역시 큰 변화를 겪지 않기 때문에 안정적인 체계와 성향을 갖는다. 반대로 환경의 변화가 크거나 열악하면 스트레스가 높아지고 본래의 성향이나 본능적인 체계에도 단시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 훈련사의 혐오 논란은 진돗개의 ‘사납다(입질한다, 공격적이다)’는 특성을 쉽게 그 종의 변할 수 없는 없는 본성으로 치부하는데서 생긴다. 이 세상 모든 동물은 환경에 반응한다. 진돗개가 사납다면 그 개는 사나운 공격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는 진돗개를 더 나아가 개와 다른 동물이 어떤 세상에 놓여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이제부터 사납다는 그 한마디 말의 무게를 들여다보자. 여기 한 명의 진돗개가 있다. 천연기념물이면서 동시에 개식용 업소의 주요 품목이다. 순종을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교배한 몇몇 개체만 대우받는 중에 자신이 잡종이라면. 잡종, 그의 길은 정해져 있다. 시골 마당에, 공장 한편에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모른 채 평생 목줄에 묶여 산다. 묶여서 떠돌이개와 교미하고 새끼를 낳으면 주인이 지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거나 용돈벌이용으로 팔아버린다. 겨울에는 추위에 벌벌 떨고 여름에는 숨을 헐떡일 정도로 더위와 갈증에 시달린다. 그러다 개장수가 나타나 주인을 설득해 버리면 모든 게 끝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고통뿐이다. 자신이 처한 고통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고통은 배가된다. 동물은 대개 인간 때문에 겪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당신이 지금 이 개의 위치에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라.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둘 중 하나다.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하거나 분노에 잠식되어 누군가를 죽였을 것이다. 


감각기관이 있는 생명체는 자신이 어떨 때 행복하고 불행한지 잘 안다. 그게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것은 그 고통을 넘어섰을 때 올 보상이 무엇인지 알 때 고통을 견딘다. 그런데 인간 주변에서 학대당하는 동물에게는 미래의 보상 따위도 없고 그 의미도 알 수 없다. 한 사회가 갖는 동물에 대한 이런 차별적인 태도를 이해하지 않고서 ‘사납다’라는 한 마디 말로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기보다는, 한 사회 안에서 누군가에게 그런 오명이 씌워질 때 오명의 대상이 처한 환경이 무엇인지 따져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각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번식장이나 도살장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하며 구조 이후 아무 런 후속 조치도 마련하지 못하는 동물단체가 과연 동물을 위하는 곳이 맞을까. 품종에 따른 성향만을 강조하며 개체가 가진 역량을 무시하는 처사가 과연 동물을 위한다고 말할 수 있는 태도일까.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일만 해결해 주면 할 일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동물과 관련한 일을 업으로 삼고 그로 인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명성까지 얻고 있다면, 그저 내가 수십 년 일한 전문가라고 말한다거나 단체가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말로 퉁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바란다. 긴 시간 한 가지 일에 종사했다는 장인의 타이틀을 쥐고 싶으면 자신의 방식이 변화 앞에서도 충분히 적용가능한지 검증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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