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하찮은 사랑 대신
나는 한 인간이 살아갈 유전적 평균 수명이라는 시간(인간은 약 40년의 수명을 갖는다) 동안 대체로 나를 정체화하는 위치가 사회적 약자 쪽에 더 가까웠고 남은 삶도 그러하리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생기는 저항 정신 내지는 저항감이 항시 뿌리 깊게 박혀있는 상태라 스스로를 권력을 가진 위치에 두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이 듦으로 인한 위계 형성에 반응 속도가 느려 젊은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결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인식하지 않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회적 약자로서 갖는 분노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식에 대한 집착이 있었고, 그 덕에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나이 어린 사람들로부터 당연하다는 듯 선생님 소리를 들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늘 내가 만나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휘두르기보다는 권력에 휘둘리다 인생이 송두리째 파탄 나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그들 곁에서 날아오는 방망이질에 흔들리지 않으려 발가락 끝까지 힘을 모아 버티는 삶이었기에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데 있어서 그리 모순되지 않았다.
늘 동물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런 나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뒤집어엎는 사건은 동물로부터 탄생했다. 도시 생활자로서 내가 만날 수 있는 동물은 인간과 경쟁적인 존재가 아닌 도시 풍경의 병풍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인식되던 존재가 태반이다. 대개 그들이 인간 눈에 띄는 경우는 사유재산 침해 문제가 불거질 때다. 현재 우리나라 도시에서 가장 문제의 중심에 오른 동물은 길고양이다. 도시 생활에 적응하면서도 도시 외의 지역에서도 적응력이 뛰어난 양가적 위치의 동물. 그래서 그의 위치성을 정하지 못해 생기는 많은 오해와 차별 그에 따르는 행정적 절차의 무일관성이라는 문제들이 줄줄 잇따른다.
나도 동물의 세계로 들어선 계기가 길고양이와의 우연한 만남 덕이다. 고양이가 단지 도시에 적응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구성원이며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고양이 혐오가 크긴 하지만 못지않게 고양이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사랑을 SNS를 통해 확인하면서 더욱더 고양이를 사회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양이의 위치를 정의하는 일은 추후로 미루고, 고양이가 불러일으키는 감정 상태에 대해 얘기해봐야 할 것 같다. 고양이에 대한 나의 감정은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감정들과는 사뭇 다르다. 고양이는 내게 귀엽고 사랑스럽고 또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감정들 이전에 따라오는 정서적 불편함이 있다. 그건 내가 거의 가져보지 못한 절대적이며 압도적인 권력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이다. 길고양이 가족을 2년 정도 관찰하고 기록한 「사람의 일, 고양이의 일」이 탄생한 배경도 바로 동물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서 절대적인 힘의 우위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행위의 선한 의지를 의심하고 경계해야 했던 경험과 감정이다. 분명 불편한(익숙하지 않은) 감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고양이가 불편하거나 불쾌한 것은 아니다. 내가 걸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 같은 태도가 동물 앞에서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투명한 옷자락으로 전락해 버린다는 진실이 주는 당혹감. 어떻게 해도 이 위치를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 그런 감정들이 동물을 대면하면서 제일 먼저 따라오는 감정들이라 동물의 뛰어난 점이나 놀라운 점에 대한 감탄이나, 인간에 의해 불의를 겪는 것에 대한 분노,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이 때론 낯부끄럽기까지 했다.
삼십 대 후반에 마지막 연애를 끝으로 더는 인간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고받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로 실랑이를 벌이는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내 마지막 연애가 끝난 이유는 상대에게 내가 자신이 처음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였고, 우리의 연애관계가 더 이상 나를 나이게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였다. 나는 그 연애를 끝으로 인간 사랑의 패턴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갖게 되었다. 인간은 낯선 대상에 대한 환상을 가질 때 사랑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며, 그 환상으로 상대를 숭배하고, 그가 가진 것이 나의 일부이길 소망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환상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상대가 더는 환상을 충족하지 못한다며 상대를 탓한다.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우주를 동경하고, 자연을 숭배하며,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지만 모든 환상이 소멸되는 시점부터는 무자비한 착취만 남게 되었다.
뿌연 연기처럼 시야를 가린 인간 사랑이 갖는 환상의 장막이 거둬지자 바로 눈앞에 동물이 떡 버티고 있었다. 마치 인간의 세계 인식 방식이 오류를 갖고 있어 그 오류를 인식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나름의 사랑에 대한 정의 덕분이랄까, 내가 동물에 대해 갖는 감정은 흔한 사랑타령 보다 어쩔 수 없이 밑바닥을 기어가는 답답함에서 출발한다. 하찮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조롱과 우둔함의 은유인 벌거벗은 임금님의 투명한 옷에서 기인하는 불편함을 깔고 그다음의 감정들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늘 약자인 것도 아니면서 약자인척 했는지도 모르는 나의 위선이 그리 볼성사 납지 않게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갖지 못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나의 인간적인 면모(자기반성적 태도)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인간-동물 관계를 고찰하게 했다. 자의식 과잉 상태의 감정에 기반하지 않고 실리적인 이해관계를 따질 때(누군가는 그것이 정 없는 관계라고 말할지라도)가 차라리 훨씬 더 선명하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원인이 고양이가 아니며 고양이도 나처럼 느낀다는 착각보다는 내 감정은 내 환상의 작용이며 고양이 역시 자기 필요가 있고 그 이유가 서로 같지 않아도 각자의 이익을 충족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감정적으로 호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존재와 존재의 대등한 대면이라는 이상으로 가는 빠른 길은 환상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보다는 이로움과 해로움의 관계를 이해하는 편이 더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