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작은 존재들의 작은 의식
나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면 반쯤 감긴 눈으로 방을 나선다. 앞을 보고 걷기보다는 수백, 수천 번을 걸었기에 몸에 밴 습관으로 걸어간다. 복도를 지나 건넌방으로 향해 실눈으로 침대 위를 훑어보고, 있어야 할 누군가를 찾는다. 펼쳐진 이불의 살짝 볼록한 지점을 확인하고 그곳에 손을 쑥 밀어 넣어 손끝부터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을 확인하면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이불속에 넣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양 엄지손가락으로 상대의 두 눈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쓰다듬는다. 그러면 상대도 이불속에서 그 손길에 화답하듯 얼굴을 내 손바닥에 비비며 기분 좋다는 몸짓으로 아침 인사를 한다.
다시 복도로 나왔을 때 잠은 서서히 거치고 다음 인사할 대상을 생각하며 걸어간다. 또 다른 방문을 열면 동시에 나를 향하는 두 얼굴이 있다. 한 명은 아직 내가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다른 한 명은 왜 이제 왔냐는 핀잔의 눈빛으로 나를 주시한다. 침대 위에 앉아있는 둘 중에 나를 꺼리지 않는 쪽으로 몸을 눕혀 그의 엉덩이에 머리를 기댔다. 손으로 꼼지락꼼지락 엉덩이를 조물 거리면 처음에는 참아주다가 그만하라고 내 손을 살짝 깨문다. 그러면 좀 더 몸을 그에게로 밀착해 모로 누워있는 그의 뒤에서 조용히 안아준다. 내가 그렇게 안아주는 걸 제일 좋아해서 숨소리가 바로 달라진다. 그런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한 5분 정도 누워 있으면 삶을 지배하는 이름 없는 불안이 잠시 누그러진다.
아직 내가 불편한 다른 이는 그 모습을 보며 동공이 확장되고 긴장한 어깨가 올라섰다. 경계의 몸짓이다. 자기한테는 다가오지 말라는. 나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에게는 다가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그와 친해지고 싶기에 침대 끝에 매달린 듯 누워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내가 노골적으로 바라보면 그 눈빛이 불편한지 졸린척하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러면 나도 따라 눈을 감는다. 살짝을 눈을 떠보면 눈 감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눈을 뜨는 것에 살짝 놀라며 자기 눈을 다시 감는다. 그러면 나도 다시 감는다. 매일 아침 그 일을 반복하며 한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 가끔은 용기 내 손을 그에게 뻗지만 그가 움찔하며 두 눈이 커다래지는 걸 보면 얼른 내 손을 거두고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야 그가 흥분하지 않고 침대를 벗어나지도 않는다.
나는 세 명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누구 하나 처지지 않는 생사의 고비를 넘긴 사연을 가지고 있는 구조 동물이다. 내가 직접 구조한 경우도 있지만 구조된 사연을 보고 입양하기도 했다. 첫째 고양이는 생후 일 개월 만에 어미에게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장마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애타게 누군가를 부르려는 듯,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듯 우는 걸 발견한 지인이 구조했다. 둘째는 길에서 피범벅이 된 상태로 구조되어 동물보호협회에 입소했다가 안락사당하기 직전에 고양이 보호 활동가에 의해 임시 보호처로 옮겨졌고, 고양이 카페에 올라온 입양공지를 보고 내가 입양했다. 셋째는 나를 처음으로 고양이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의 일 고양이의 일」의 주인공이다. 8살까지 길에서 생활했고 재건축지역의 빈집을 전전하다가 구내염까지 얻어 고양이 세계에서 도태되는 중이었다. 철거가 시작되면 구조가 어려울 것 같아 직전에 구조했다.
셋은 모두 자기 삶에 대한 아픔과 욕망과 행복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습관과 미련스러움 그리고 벗어나려는 애처로움도 안고 있다. 첫째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와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른다. 사람이 분유를 먹이고, 사람이 배변활동을 유도해 주고, 사람이 놀아주고,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구분하고, 사람과 같이 잠을 자고, 사람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둘째 고양이가 나타났을 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해 일 년 동안 혈변을 볼 정도로 괴로워했다. 둘째 고양이는 보호소 생활과 임시보호처를 돌다 보니 자신을 이동시키려는 어떤 전조가 보이면 두려워하며 구석에 숨었다. 초인종 소리가 그 신호였고 초인종이 울리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초인종을 울린 원인이 사라졌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슬금슬금 나타나 낮은 포복으로 방방마다 이상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첫째 고양이에 대한 질투가 심해 사람에게 관심받기 위한 애정 표현을 잘하고 잘 요구하는 고양이다. 셋째 고양이는 사람하고 살아 본 적이 없는, 그런 관계를 상상도 해보지 못한, 오직 고양이들과의 관계만 잘 이해하는 고양이다. 집에 들어와 사람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3개월 정도 케이지에 갇혀 지내야 했다. 케이지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다른 고양이들과는 잘 지내보려고 노력했고, 특히 둘째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둘째가 보이지 않으면 온 집안을 뒤지며 찾아다닌다. 셋째에게 둘째는 사람의 영역에서 살기 위해 배워야 할 모든 행동의 기준점이 되었기에 의지의 대상이면서도 애정의 대상이다.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를 때는 책이나 인터넷 정보에 의지했다. 공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종 특성에 대한 정보이다 보니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일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각각의 고양이가 겪은 사연이 다른 만큼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픔이나 트라우마를 어떤 방식으로 안고 살아가는지는 저마다 달라 평균적인 지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고양이가 나의 반려라면 나는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밥 주고 가끔 장난감 흔들어 주는 것이 고양이를 위하는 일의 전부는 아닐 텐데 말이다.
한 종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시대에 그 종의 개체가 갖는 특이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그에 관한 글이 사람들에게 어떤 설득력을 줄지 의문이 들긴 한다. 영화 <파묘>에서 돼지를 난도질하는 영상으로 동물단체가 동물 이용방식에 대해 비판했고 또 이에 대해 시민들은 동물단체를 비난했다. 비난을 퍼붓는 시민들은 단지 고기에 불과한 돼지를 인격체로 대하는 동물단체에 대해 불편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이 시대에 동물 운동은 과연 “동물은 지각력이 있다.”라는 멘트 한 마디로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들지만, 나는 더 이상 동물에 눈뜨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 나아갈 수밖에.
내게 작은 힌트가 되어준 것은 사샤 세이건의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이다. 인간의 수많은 의식과 의례가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부터의 과학적 행위였으며, 두려움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려는 ‘작은 존재들’의 노력과 사랑의 산물임을 보여준 책이다. 시대가 변했어도 어떤 의식은 여전히 우리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는데 대개 인간의 생애주기와 관련된 의식이나 천문학과 관련된 절기 관습이 맥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그 많은 인간들의 의식과 의례에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제물로 희생당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것은 과학이 많은 것을 밝혀냈고 이제 우리는 동물이 더는 우리의 번영을 위한 제사도구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글로벌한 시대에 인간의 작은 활동 하나조차 전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되었고, 그 덕에 지구 환경은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 인간공동체가 아닌 지구공동체 안에 비인간 생명체가 공동체의 일부라는 감각을 갖게 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내가 찾은 작은 방법은 습관이다. 동물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관계 맺는 습관. 동물과 눈 맞추고, 상대의 심장 리듬에 맞춰 숨을 고르고, 그가 바라보는 곳을 뒤에서 같이 바라봐주고, 내게 보내는 모든 신호에 화답하려 노력하는 것. 나의 세 명의 고양이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손길을 내게 요구하고 난 늘, 매일, 아침마다 그 요구에 기꺼이 응답한다. 나 역시 삶이 주는 항구적인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힘 있는 자들의 약속이 아니라 이 약한 존재들이 주는 사랑이기에, 우리는 매일 아침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는 아침인사 의례로 하루를 시작한다.
고양이와 나의 이 작은 의식이 주는 힘은 분명하다. 내가 과학자는 아니더라도 과학적인 태도로 사물을 이해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고, 동물에게 씌워진 수많은 편견과 오명, 오해의 준거들에 대항하고 해명하려는 의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동물도 인간처럼 ‘자기 삶에 대한 아픔과 욕망과 행복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와 그 정도만 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