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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handhan Jun 12. 2024

동물이 나타났다

06 노숙인 - 01

재건축 지역에서 동네 고양이를 재건축 구역 밖으로 이동시키는 일을 7년째 하고 있다. 7년이라는 숫자로 판단하면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기에 가끔씩 숫자를 가늠해 보고 나조차 놀라긴 한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나를 단련시키기도 했고 고양이들과 나름의 많은 추억을 쌓았기에 긴 시간을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고양이는 영역 이동이 쉽지 않은 동물이다. 영역에 대해서 만큼은 상당히 보수성을 갖고 있지만 무조건적인 것도 아니라 고양이의 행동 경향을 이해하려면 종적 특성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지만 개체의 성향을 이해하는 일도 아주 중요하다. 문제는 내가 고양이 하나하나의 개성을 이해하려는 노력과는 별개로 재건축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거의 사람들 간의 문제다. 조합의 이해, 관공서의 이해, 활동가들 간의 견해 차이 등등 많은 부분에서 조율할 부분들이 있지만 간혹 이런 뻔한 예상을 빗겨나가는 존재들이 불쑥 개입하기도 한다. 


빠른 속도로 이주가 이루어질 때 빈집이 늘어나고 이사 쓰레기가 도로를 점령해 고양이들의 급식소가 쓰레기 더미에 깔리는 일이 벌어졌고, 고양이 급식소도 쓰레기를 피해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했다. 재건축지역 경계 바깥으로 급식소를 이동시키고 고양이들을 유인하던 때의 일이다. 재건축 지역의 일부 경계면이 근린공원과 맞닿아있어 그쪽으로 급식소를 이동하면서 가급적 사람 눈에 안 띄는 자리를 찾아 급식소를 설치했다. 공원 이용자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고양이들이 안전하게 느낄 적당히 트인 공간. 즉 고양이가 먹이를 먹고 있는데 다른 고양이가 나타났고 하필 나보다 강한 고양이라면 먼저 피해야 하는데 피할 길이 외길이면 그곳은 여러 고양이가 이용할 수 없는 서열 높은 고양이의 전용 식당이 돼버릴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적당히 도주로가 확보된 트인 곳이면서도 아늑한 곳을 찾는 눈이 발달해 빨리 찾는 편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보는 눈이 없어 무거운 급식 상자를 이리저리 이동해 보면서 최대한 이주할 고양이들이 다 이용할 수 있는 곳을 찾느라 몸이 고생을 많이 했다. 

그즈음 급식소에 사료를 채우러 갈 때마다 만나는 한 남성이 있었다. 솔직히 마을이 텅텅 비어가는데 굳이 급식소 근처에서 서성이는 그 남자를 볼 때마다 너무 무서웠다. 항상 혼자서 활동하다 보니 빈집만 있는 마을경계 산자락에서 만나는 남자가 반가울 리 없잖은가. 그래도 무서워하는 티는 안 내야겠기에 “낑아! 낑아! 어딨어? 얼른 와서 밥 먹자!” 하고 고양이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어딘가 있을 누군가에게 나의 기척을 알리는 것이 유일한 안전장치였다. 고양이를 부르다가 혹시 고양이한테 해코지하는 사람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그나마도 부르지 못하고 조용히 사료만 채우고 급하게 떠나오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급식소 근처에 그 남자가 서성이고 있는데 모른 척하고 급식소에 사료를 채우다 살짝 고개 돌려 그를 봤는데 칼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속으로 “아씨!”라는 외침이 따발총 쏘듯 쏟아져 나왔고, 쭈그리고 앉아 급식소를 청소하던 나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뛰쳐나오고 싶었으나 계속 이곳에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돌발행동을 할 수 없었다. 손놀림을 빠르게 놀리면서도 뒤태에서는 침착함을 보여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청소와 사료 채우기를 마쳤다.  몸을 일으켜 그가 있는 쪽을 쳐다보며 그의 동태를 확인하고 반대쪽으로 몸을 천천히 돌려 급식소를 벗어났다. 도주로는 고양이들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대단히 대범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날 호들갑 떨지 않은 덕에 몇몇 빛나는 날들을 마주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빨리 해소되었다. 그는 노숙인으로 자신이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면서도 사람을 피할 수 있는 도주(?)로가 확보된, 마침 고양이 급식소가 있는 위치와 겹치는 곳에서 자기 살 곳을 마련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급식소 근처에는 그가 어디선가 구해온 깨끗하게 닦인 밥공기와 반찬 그릇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나뭇가지에는 빨아서 널어놓은 셔츠가 햇빛과 바람에 말라가고 있었다. 그의 생활권이 마침 고양이의 생활권과 겹쳤을 뿐이고, 그도 고양이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한 동에서 재건축이 무려 15곳에서 진행 중이다. 어디 한 군데 조용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활동하는 재건축 지역의 도로 건너편에도 재건축이 진행 중이다. 길건너에도 고양이들이 있는데 그중 오래된 이발소 앞의 늙은 고양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재건축 지역에서 가장 늦게 이주한 이발소 사장님도 남겨질 늙은 고양이가 안쓰러워 이사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지만 고양이를 데리고 살 여력은 없어 결국 남겨두고 떠나셨다. 내 활동구역을 한 바퀴 돌고 떠나는 길에 늙은 고양이를 찾아가는 것이 그날의 마감 활동이기도 했다. 차를 몰고 가다 보면 저만치 고양이가 이발소 앞에 앉아 있는 게 보이는데, 그날은 달랐다. 누군가가 고양이와 함께 앉아 있었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지는 확인하고 싶어서 그들을 지나쳐 주차를 하고 사이드 미러로 둘을 확인했다. 산에서 만나는 노숙인이었다. 가진 것이 없는 그가 고양이에게 줄 것이라고는 애정 밖에 없어 고양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늙은 고양이는 그거면 족하다는 듯 연신 그의 손과 다리에 제 얼굴과 몸을 비비며 화답했다. 거울에 비친 둘의 모습을 보면서 산에서 그를 만날 때마다 무섭다고 생각하고 경계심 가득한 기운을 뿜어냈을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손바닥만 한 거울 안에 비친 장면의 파장은 컸다. 마치 나를 되비쳐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간 활동에 있어서 내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에 치이다 보니 그처럼 고양이 하나하나에 대해 살갑게 대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어쩔 때는 고양이를 이주시키는 목적 때문에 관찰대상으로만 여기기까지 했다. 과학이 무섭고 잔인할 때가 그럴 때인 것 같다. 관찰자를 전지적인 자리에 놓고 모든 것을 관찰하고 하나하나 해부하듯 쪼개고 분할하면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말이다. 과학자인 양 고양이만 관찰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고양이를 관찰하는 내가 고양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했다. 나도 동물인데 내 행동의 의미가 고양이들이라고 다 똑같이 이해되었을 리 만무하다. 또 내가 그를 불편하게 여긴 것처럼 그도 내가 불편했을 것이다. 


어렵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숱한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운 내게 외진 곳에서 만나는 남자를 무던히 넘길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는 위치에 놓인 그가 누구를 쉽게 폭력적으로 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것 역시 분명하다. 폭력적일 수 있는 것은 그런 위치와 힘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찌 보면 둘 다 사회적 약자인데 저 약자에게 내 약자성이 더 크다고 몸짓으로 말했던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와 고양이가 애정 어린 관계를 맺고 나와 고양이가 그러한데 그와 내가 적대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정작 우리를 내몬 것은 재건축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이윤에 대한 욕망들일 텐데 말이다. 나는 그나마 불편함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조차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인지 모른다. 누군가 여기 노숙자가 있다고 신고만 해도 그는 바로 쫓겨날 테니까. 

사람들은 바퀴벌레가 다가오면 자신이 죽임이라도 당할 것처럼 이상한 공포심에 휩싸여 정작 자신의 힘을 남용해서 바퀴벌레를 쳐 죽이는 이상한 피해의식처럼, 고양이가 요물이라 무섭다는 이상한 혐오처럼, 그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두려움처럼 이상하게 두려움에 잠식당하면 선을 넘어버리는 것이 동물의 습성일까.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놀랐음에도 소리 지르거나 신고하지 않은 덕에 늙은 고양이가 이발소 사장님 떠난 후에 외롭지 않게 또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각자의 위치와 관계는 그리 단순하게 정의 내리고 고정할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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