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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handhan Jun 19. 2024

동물이 나타났다

07 노숙인 - 02

재건축 지역에 펜스 설치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때 더는 재건축 지역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펜스 바깥에서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고 펜스 바닥에 난 구멍 중에 고양이가 나올 만한 크기의 구멍에는 냄새 진한 고양이 캔을 둬서 펜스 바깥으로 고양이를 유인했다. 재건축 지역과 닿아있는 근린공원은 사람이 모두 떠나자 찾는 이도 뜸해졌다. 사람 발길이 줄어든 근린공원에 잡초가 사람 키만큼 자랐고 고양이들이 숨기 좋은 잡초 사이를 헤치며 누가 이주했는지 찾았다. 


© 2024. dhandhan 노숙인의 비품이 저장된 더미


고양이를 찾던 중에 묘지처럼 생긴 더미가 보였다. 반투명 비닐로 덮인 것이 안에 물건을 쌓아 둔 것 같았다. 재건축 지역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작업 물품인가 했는데 더미 오른편에 어릿하게 익숙한 이미지가 보인다. 시리얼 봉투다. 찬찬히 둘러보니 왼편에는 닭백숙 레토르트 파우치가 있다. 식료품 창고다. 단박에 노숙인이 숨겨 놓은 비품 창고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먹고 사는구나. 


근린공원과 재건축 지역이 닿아있는 길이는 대략 백 미터 정도 되는데 그 길이에 나는 총 네 곳의 급식소를 마련했고 그 네 군데 급식소마다 노숙인의 생활 흔적도 겹쳤다. 첫 번째 급식소 부근에서 발견한 그의 흔적은 비품창고와 텃밭이다. 비품 창고 옆에 약간의 밭을 조성했는지 땅을 일구고 호박을 심었다. 호박을 키울 물은 낡은 페트병에 담겨 비축되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구역으로 호박이 자라기에도 제격인 위치지만 냉동식품을 해동하기에도 좋은 위치여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게다가 사람이 다니는 길 안쪽에 자리한 비품창고와 텃밭은 관목과 잡초로 잘 가려져 안에 들어가 봐야만 이런 게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었다. 

두 번째 급식소 부근에는 낮동안 그가 머무는 정자와 각종 운동기구와 너른 마당이 있다. 그곳에서 낮잠을 자고 라디오를 듣고 게임을 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운동기구를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낡은 축구공이 하나 있는데 매번 공이 놓인 위치가 다른 것으로 보아 공을 차며 놀이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본 적이 없어 이도 내 추측이다. 재건축 이전에도 정자와 마을 사이에 나무 펜스를 놓았는데 지금은 주로 그의 빨래대로 사용되고 있다. 

세 번째 급식소 부근에서는 종종 불을 지핀 흔적이 있다. 아마 불이 필요한 음식을 해 먹은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곳이 가장 많은 고양이들이 오가는 급식소라 불안하긴 했지만 그도 조심스럽게 불을 피운 것 같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네 번째 급식소 부근도 작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가 주로 활동하는 정자에 여러 사정으로 머물 수 없을 때 피신해 있는 곳이다. 대개는 근린공원에 교육용으로 설치된 어린이 자연학습터를 찾은 유치원생들이 산행하다가 정자에 들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그가 네 번째 급식소 부근의 정자로 피신해 있는다.


© 2024. dhandhan 냉동식품을 햇빛에 해동시키는 노숙인의 장비


그의 생활상을 보고 있으면 영화 <김씨 표류기>가  떠오른다.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김 씨가 밀려난 곳은 도시 한가운데 있는 무인도(밤섬). 도시 생활과 분리된 생활을 이어가지만 그의 생존을 유지시키는 것은 오히려 도시에서 밀려 나오는 버려진 공산품들이다. 새똥을 모아 밭을 일구고 싹을 틔우는 장면은 자연적인 삶도 가능할 것처럼 보였지만 태풍 한 번에 모두 쓰러지는 현실은 오히려 삭막하다고 표현되는 강 건너 고층 빌딩들의 굳건하고 안전한 모습과 얼마나 대비되는지 슬프면서 웃기다. 태풍이 쓸고 간 흔적을 정리하려고 무인도에 들어선 공무원의 출현이 있고서야 그의 야생스러운 삶은 끝난다.  김 씨의 몇 개월에 이어진 야인 생활은 우습기도 하지만 극단적인 절망감도 안겨주는데, 마치 이 지구에 더 이상의 탈출구 따윈 없으며 야인의 생활도 동물들이 구조되어 머무는 생츄어리처럼 도시시스템의 관리 아래 작동되는 유사 자연의 모습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개월 동안 도시를 떠나 있었지만 그가 다시 강을 넘어 도시로 돌아왔을 때 버스카드가 여전히 유효한 상태임을 확인하는 장면은 그의 삶이 탈주가 아닌 잠시의 일탈이었음을 증명하는 확인 도장 같았다. 


재건축 지역은 한시적이지만 생태계가 작동하는 섬 같았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가고 철거가 지연되던 시기에 인간의 모든 활동이 멈추자 건물이 무너지는 속도만큼 빠르게 인간 아닌 생명체가 번성했다. 담장이 넝쿨이 건물 전체를 덮고, 골목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잡초가 군락을 이뤘다. 잡초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참새들의 먹이 활동, 참새를 도망 다니는 작은 벌레들. 벌레를 잡아먹는 포식 곤충, 곤충을 사냥하는 까치, 까치를 사냥하는 고양이, 고양이 사체를 먹기 위해 몰려드는 까마귀. 완벽한 먹이 사슬이 작동하는 유사 자연상태가 펼쳐졌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유일한 사람, 노숙인이다. 그 역시 도시 생활에서 밀려나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이 인간 활동이 유예된 재건축 지역이었으나, 바깥에서 잠을 잘 뿐 도시의 잉여에 기대 생활한다. 노숙인과 김 씨의 차이라면 그를 몰아내는 것은 공무원이 아니라 자본 이익의 욕망들일 것이다. 재건축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시 들어서면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있지 못할 것이다. 집값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움직일 때만큼 무서울 때가 또 없으니까.


그에게 어설픈 동정심을 가졌었고, 호의를 베푼 적도 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절을 당한 이후로 나는 그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가 노숙을 한다는 것이 동정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2년 여에 걸쳐 그의 생활상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그의 존재가 제도의 허점일 수는 있지만 그에게 지금의 삶이 자기 인생의 허점이라고 말할 이유는 없으니까. 제도 안의 삶은 분명 편하고 보호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만큼 삶과 죽음의 여정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통제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고양이를 시작으로 많은 동물의 삶에 관심 갖기 시작했을 때 늘 따라다니는 질문은 그들을 살리는 일과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죽었으면 하는가의 문제에 직면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건강하고 아름답게 오래 지속되는 삶의 모습은 수많은 동물 착취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더는 아프지 않은 것을 바라거나 오래 살기를 바라기보다 죽음으로 향하는 삶의 과정을 어떻게 꾸리고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 질문이 안겨주는 혜택은 더는 고가의 아파트나 의료시스템에 포함되거나 여유로운 노후를 위한 투자 활동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본을 추구하는 활동에 더 이상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내 삶도 무관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말하는 어떤 추구하는 모습들이 나와 다른 만큼 나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에게 무책임하거나 나이 들어서도 현실 감각을 갖추지 못한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늘 전체적이거나 통합적이기보다는 파편적으로 시작해 결론 없이  끝나버린다. 그런 나를 애처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나를 나름의 공동체 안에 삽입하려 애쓸 때마다 나는 노숙인처럼 단호하게 거절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동정이 아니기 때문에. 


노숙인의 지금 생활도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그것이 김 씨처럼 다시 제도 안으로 포섭될지 아니면 다른 재건축 지역을 찾아 떠날지는 알 수 없다. 또 나와 그 사이에는 영화의 멋진 엔딩 같은 서로를 알아보는 환희의 순간도 없을 것이다. 그저 그가 지금 누리는 일탈과 탈주 사이의 포지션이 갖는 삶의 가능성을 응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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