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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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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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江 김석인 시인
첫눈이 내리는 날,
만추의 마지막 숨결 위로
하얀 고요가 내려앉는다.
강원 산길도, 서해 바람도
순식간에 겨울의 얼굴이 되고
그 속에서
당신 생각이 먼저 흩날린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눈송이보다 느리게,
그러나 더 깊게 내려
가슴속에 고이는 저녁,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그리움은 말보다 조용해지고
나는 첫눈 아래서
아직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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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의 정서와 기다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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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江 김석인 시인의 「첫눈이 내리는 날」은 계절의 전환이라는 자연 현상을 ‘그리움’이라는 정서와 포개어, 아주 섬세한 정념의 결을 그려낸 시다. 이 작품의 핵심은 첫눈을 단순한 자연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고, 한 사람의 감정이 완전히 드러나는 장면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그리움이 자연의 시각적 변화 속에서 더욱 가라앉고, 더 깊이 몸을 누이며 자리 잡는다. 시인은 계절의 감각을 정서의 움직임으로 섬세히 번역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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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의 ‘고요’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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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은 풍경을 묘사하면서도 이미 정서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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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추의 마지막 숨결 위로
하얀 고요가 내려앉는다.”
여기서 ‘만추의 마지막 숨결’은 계절이 다해가는 순간의 미묘한 온기와 쓸쓸함을 동시에 담는다. 첫눈은 대개 설렘으로 묘사되지만, 이 시에서는 ‘고요’로 표현된다.
즉, 계절의 막이 바뀌는 ‘정적’이 먼저 깔리고, 그 위에 화자의 감정이 흩뿌려지기 시작한다.
풍경은 배경이 아니라 정서의 무대다.
시인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마음의 변화가 가장 먼저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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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확장, 정서의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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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 산길도, 서해 바람도
순식간에 겨울의 얼굴이 되고
그 속에서
당신 생각이 먼저 흩날린다.”
강원 산길과 서해 바람-양극의 공간을 한 시안에 배치해 계절의 전환을 전국적 스케일로 확장한다.
하지만 이 넓은 공간 속에서 시선은 결국 단 한 곳으로 귀착된다.
바로 ‘당신’이라는 내밀한 중심.
즉, 시의 시야는 크게 열렸다가 다시 좁혀진다.
이 대비가 깊은 울림을 만든다:
자연은 넓어지는데
마음은 오히려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이 구조는 첫눈이 오면 떠오르는 누군가라는 보편적 경험을 울림 있게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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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그러나 깊게’---첫눈 아래의 감정의 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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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싶다는 마음은
눈송이보다 느리게,
그러나 더 깊게 내려
가슴속에 고이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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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은 감정 묘사의 핵심이다.
눈송이보다 ‘느리다’는 표현은 단순한 속도가 아니라 감정이 내려앉는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천천히, 그러나 깊이.
감정은 빠르게 살지 않는다.
사랑도, 그리움도, 기다림도 속도를 내지 않는다.
여기서 ‘저녁’은 하루의 끝이자 마음의 쉼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리움이 응고되는 시간이다.
첫눈이 왔음에도 화자는 밝아지지 않는다.
눈이 내릴수록 오히려 마음의 무게가 내려앉는다.
이 시는 그런 ‘감정의 침강’을 정직하게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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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시간성과 ‘기다림’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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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가까워질수록
그리움은 말보다 조용해지고
나는 첫눈 아래서
아직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연말이라는 시간성은 시를 더욱 울림 있게 만든다.
한 해를 정리해야 하는 시점, 마음을 돌아보는 시기, 잡음보다 침묵이 크게 들리는 계절.
이 시는 그 연말의 정서를 정교하게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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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리움은 말보다 조용해지고”라는 표현은 절창이다.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말이 줄어드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말은 얕을 때 넘치고, 깊을수록 고요해진다.
이 문장은 시 전체의 정서를 완성시키는 핵심 문장이다.
마지막 행에서 시인은 단순한 ‘기다림’을 넘어서 포기하지 않는 마음의 지속성을 드러낸다.
첫눈은 일시적이지만, 기다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첫눈의 순결함과 연인의 실루엣이 겹쳐지며 시가 완전히 정서화되고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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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의 시학, 기다림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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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江 김석인 시인의 이 시는 첫눈을 통한 한 사람의 존재 회복의 시학이다.
사실 첫눈이라는 소재는 오래 사용되어 왔지만, 이 시는 상투성을 피하고 자연과 정서를 정교하게 맞물리게 한다.
눈의 속도, 계절의 얼굴, 연말의 시간성 등 구체적 이미지가 마음의 움직임과 맞물리며, 전체 구조가 흔들림 없이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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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뛰어난 점은 다음 세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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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묘사에 머물지 않고 감정의 깊이를 끌어낸 구성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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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을 감상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침전시키듯 다룬 절제된 문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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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연말, 저녁이라는 세 시간적 층위를 겹겹이 놓아 만든 서정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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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전체는 조용하지만, 내면은 깊이 진동한다.
첫눈처럼 흩날리지만, 마음속에서는 천천히 가라앉는 그리움의 층위.
이 시는 그런 정서를 정확히, 그리고 아름답게 겨울의정서와 낭만을 붙잡아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