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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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경 박사 시집 〈수다〉 -말의 기원을 다시 연 시인의 내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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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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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 — 상이 시인을 찾아간 드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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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문학상은 이름 자체가 이미 의미를 완성한다.
그러나 지은경 박사의 시집 〈수다〉가 이 상을 받은 순간,
문학적 무게 중심은 오히려 거꾸로 움직였다.
상이 작품을 빛낸 것이 아니라,
작품이 상의 품격을 끌어올렸다.
그런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을 문학인은 누구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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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는 “말”이라는 가장 가벼운 재료로
가장 무거운 질문들을 정면에서 건드린 시집이다.
가벼운 단어 하나를 들어 올려
존재론적 깊이로 끌어올리는 손길,
그것이 바로 문학이 가야 할 진정한 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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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라는 제목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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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수다”는 흩어진 말, 가벼운 말,
혹은 소음처럼 스쳐 지나가는 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지은경 박사의 시 안에서
수다는 전혀 다른 의미로 뒤집힌다.
그는 말이 가볍다고 보지 않는다.
가벼운 말속에서 인간의 본심이 가장 먼저 새어 나온다고 보았다.
오히려 절제한 말보다
제어되지 않은 말이 인간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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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는 이 발견을 시적 구조로 정교하게 세워 올린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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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겨내는 시인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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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경 박사의 시선은
일상의 표면을 바라보지 않는다.
아주 작은 말과 장면에서도
그 밑에 숨은 감정의 골격을 꺼내어
빛이 닿는 곳에 올려놓는다.
그는 흔한 장면을 낯설게 만든다.
그 낯섦은 기술이 아니라
대상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 진지한 응시는
일상에 가려졌던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등불처럼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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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속도와 감정의 속도가 다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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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말은 놀라울 만큼 빠르다.
그러나 감정의 속도는 그 말에 따라오지 못한다.
이 어긋남에서 상처도, 후회도, 성찰도 발생한다.
지은경 박사는 이 간극을 누구보다 정확히 보았다.
말이 앞서가면 감정은 늦게 따라오고,
그 늦은 감정이 남기는 후회가
때때로 우리의 성숙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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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는 이러한 인간의 내면적 시간차를
섬세하게 잡아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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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무거운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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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는 말에 관한 시집 같지만,
사실은 침묵에 관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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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계속 흘러나올수록
오히려 더 울리는 것은 말 뒤의 정적이다.
말이 멎은 순간의 숨 가쁜 고요,
그 틈에서야 비로소 진심이 드러난다.
지은경 박사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침묵의 무게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그 무게를 시 속에 담아내는 능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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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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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는 쉽게 위로하지 않는다.
위로란 애초에 가벼운 말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상처를 진솔하게 바라보고
그 상처의 결을 천천히 어루만진다.
지은경 박사의 시는
상처를 ‘판단’ 하지 않고,
상처의 흐름을 따라가
그 흐름 끝에서 조용한 성찰의 빛을 건넨다.
그 빛은 뜨겁지 않다.
그러나 오래 남는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치유의 문학이면서도 윤리적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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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 감성의 새로운 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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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는 여성의 내면을 다루지만
섬세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안에는 투명한 강도가 있다.
그의 여성성은 유약함이 아니라
진짜를 말하려는 내적 용기에서 온다.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한 시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이것이 지은경 박사가
단순한 여성시인의 범주를 넘어서
‘사유하는 시인의 계보’로 들어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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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 철학, 심리학이 스며든 시적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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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는 언어의 표면만 다루지 않는다.
말의 음성, 말의 무게, 말의 관계,
말이 전달될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반응까지 함께 꺼내어 놓는다.
그는 한 문장을 쓰더라도
그 문장이 인간의 감정 깊숙한 곳에서
어떤 진동을 일으키는지까지 계산해 놓은 듯 정교하다.
이런 다층적인 언어 구조는
그의 시를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사유의 문학으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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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의 진로를 바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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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는 오랫동안
이미지 중심, 감정 중심의 흐름을 걸어왔다.
그러나 〈수다〉는 그 흐름을 확장시키는 작품이다.
말은 왜 존재하는가.
사람은 왜 말하며, 왜 때로는 말하지 못하는가.
말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연결하고,
어떻게 찢어놓는가.
〈수다〉는 이 근본적인 질문을
시적 감각과 학문적 깊이로 풀어냄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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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수다는 더 이상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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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경 박사의 〈수다〉는
“말”이라는 가장 흔한 도구로
가장 드문 깊이를 만든 시집이다.
가벼운 말의 소음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정확하게 읽어낸 이 시집은
말의 존재론, 침묵의 윤리, 감정의 구조를
새롭게 제시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제펜문학상의 선택은
문학사의 긴 맥락 속에서 보아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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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는
말의 본질을 다시 묻고,
말의 경계를 확장하며,
말의 무게를 정직하게 드러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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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가벼운 말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숨결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 시적 언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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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회 국제펜문학상 시부문 수상의 영광은
시인이 받을 기회가 많지 않기에
다시 한번 경사스러운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박성진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