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르비 델라 마돈니나(6)
인테르의 홈구장을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 밀란의 홈구장을 산시로 스타디움이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어로는 스타디오라고 해야 하는데 편의상 영어식 발음인 스타디움이라고 칭한다.) 이 때문에 해외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양 팀의 홈구장이 각각 다른 것으로 알고 있기도 하는데 밀란과 인테르는 같은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KBO리그에서 LG와 두산이 같은 잠실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듯이 말이다. 다만, LG나 두산은 누가 홈경기이든 구장 이름이 똑같이 잠실야구장인 반면 밀란과 인테르는 어느 팀 팬이냐에 따라 부르는 구장 이름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왜 같은 축구장의 이름이 어느 팀 팬이냐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것일까?
밀라노의 두 날개, 밀란과 인테르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축구장의 원래 이름은 산시로 스타디움이다. 산시로는 경기장이 있는 지역의 이름이므로 상암동에 있는 축구장을 상암 월드컵경기장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1926년에 육상 트랙이 없는 축구 전용구장으로 지어진 산시로 스타디움은 원래 AC 밀란이 단독으로 소유하고 홈구장으로 사용하였으나. 20여 년 후인 1947년, 다른 구장을 홈으로 쓰던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가 산시로 스타디움으로 이사를 옴으로써 한 지붕 두 가족이 되었다.
1979년 8월, 두 번의 월드컵 우승을 견인한 이탈리아 축구 최초의 판타지 스타 주세페 메아차가 사망하자 이탈리아 전역이 추모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주세페 메아차를 추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제안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밀라노의 산시로 구장에 주세페 메아차의 이름을 헌정하자는 것이었다. 주세페 메아차는 인테르와 밀란에서 모두 뛴 적이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제안이었지만 사실 밀란 입장에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주세페 메아차는 18살에 나이에 인테르에 입단하여 구단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끌었고 인테르 2기 시절까지 포함, 15년을 인테르에서 뛰며 세리에 A 3회, 코파 이탈리아 1회, 월드컵 2회 우승을 차지한 이탈리아와 인테르의 슈퍼스타였다. 그는 전성기가 지난 1940년, AC 밀란으로 팀을 옮겼지만 2년 만에 유벤투스로 이적하면서 밀란에서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실제로 주세페 메아차는 밀란으로 팀을 옮긴 후 첫 번째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를 앞두고 인테르를 상대로 축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인테르를 사랑했다. 이처럼 주세페 메아차의 화려한 경력들은 대부분 인테르에서의 활약이었고 은퇴 후 인테르의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팬들에게도 영원한 인테르의 레전드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것은 불멸의 투수 최동원이 롯데와 삼성에서 모두 선수생활을 했지만 대부분의 야구팬들이 롯데의 레전드라고 생각하지 삼성의 선수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밀란은 홈구장의 이름을 라이벌인 인테르의 레전드 선수의 이름으로 바꾸는 게 너무나도 싫었지만 주세페 메아차에 대한 전국적인 추모 열기 때문에 선뜻 반대하지 못하다가 결국 산시로 스타디움에 주세페 메아차의 이름을 헌정하는 데 동의하고 만다. 이로써 1926년에 만들어진 유서 깊은 산시로 스타디움의 이름은 1980년, 공식적으로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으로 변경된다. 인테르 팬들은 열광했지만 밀란 팬들은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축구장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이 되었지만 밀란 팬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홈구장을 산시로 스타디움으로 부른다. 이것이 밀란의 홈일 때는 산시로 스타디움, 인테르의 홈일 때는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밀란과 인테르의 남은 이야기도 이해하지 못한다. 밀라노 더비는 같지만 다른, 홈구장의 이름을 이해하는데서 출발한다.
오직 영국인과 이탈리아인만 선수로 받아들이겠다는 밀란의 권력자 지안니노 캄페리오 발표는 밀란을 둘로 분열시켰다. 밀란의 결정에 반발한 사람들이 팀을 뛰쳐나가 모든 국적의 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한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창단한 것이다. 밀란은 그들을 이탈리아의 반역자라고 비난했고 국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밀라노의 우파 세력은 밀란으로 집결했다. 이에 대항하여 모든 인종차별과 민족주의에 반대하던 좌파 지식인들은 인테르는 지지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입장은 무솔리니 집권 이후 완전히 뒤 바뀌게 된다.
집권 초기에 무솔리니는 밀란과 인테르를 모두 싫어했다. 밀란은 적국이었던 영국인들이 만든 구단이었고 인테르는 파시스트가 가장 싫어하는 '국제주의'를 표방한 구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테르는 주세페 메아차를 비롯해 월드컵 2연패의 주축 선수들을 배출했고 이는 축구를 통해 이탈리아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무솔리니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이를 기점으로 인테르는 무솔리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고 우파 부르주아 세력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반면 영국인들이 만든 구단으로 낙인찍힌 밀란은 무솔리니 집권기 내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이는 밀란을 反파시스트 세력의 근거지로 만들었고 밀라노의 좌파 노동자 세력은 밀란을 열렬히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적인 성향은 무솔리니 몰락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AC 밀란은 밀라노의 노동자들과 좌파들의 팀이 되었고,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는 밀라노의 기업가들과 부르주아들의 팀이 되었다. 이런 양 팀의 계급적인 성향은 1960대부터 시작된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격렬하게 부딪혔지만, 1986년, 파산 위기에 있던 밀란을 이탈리아 최고의 언론 재벌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전격 인수하면서 양 팀의 정치적 대립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밀란과 인테르는 긴 구단 역사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단 두 명의 영구결번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 수비 축구의 본진인 이탈리아의 구단답게 4명 모두 수비수라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먼저 밀란의 영구 결번은 프랑코 바레시(6번)와 파울로 말디니(3번)이다. 두 선수 모두 세계 축구 역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수비수였으며 선수 생활 전부를 밀란에서만 뛰었던 원클럽맨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테르 역시 자친토 파케티(3번)와 하비에르 사네티(4번), 두 명의 영구결번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 파케티는 풀백의 오버래핑을 최초로 시도함으로써 축구계의 패러다임을 바꾼 현대 풀백의 원조로 꼽힌다. 그는 인테르의 유러피언컵 2연패를 견인했고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11년 동안 주장으로 활약하며 유로 1968 우승 및 1970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었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출신인 사네티는 인테르에서만 19년을 뛰었고 1999년부터 2014년 은퇴할 때까지 15년 동안 인테르의 주장을 역임한 인테르의 영원한 레전드다.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센터백이었던 밀란의 바레시는 스피드와 힘, 넓은 시야와 강력한 태클을 모두 갖춘 선수였고 아리고 사키는 바레시를 주축으로 압박축구를 펼치며 1980년대 후반부터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끌었다. 인테르의 파케티 역시 에레라 감독이 주창한 카테나치오의 핵심 선수로 1960년대 ‘라 그란데 인테르’ 시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두 선수의 커리어는 거의 20년 가까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가 힘든데 반하여 파울로 말디니와 하비에르 사네티는 양 구단의 주장으로서 팀의 리더들이었으며 오랫동안 세리에 A와 여러 유럽리그에서 격돌하면서 실제로 밀라노 더비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각각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최고 수비수로서 펼친 두 선수의 자존심 대결은 오랫동안 회자되는 명승부였다.
말디니와 사네티의 맞대결 이전인 1980년대 후반, 두 팀은 아주 흥미로운 맞대결을 하며 밀라노 더비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른바 네덜란드 출신의 오렌지 삼총사와 독일 출신의 게르만 삼총사의 맞대결이 그것이다. 유로 88에서 환상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네덜란드를 우승으로 이끈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레이카르트가 모두 밀란에 모이게 되자 인테르는 독일의 주장이었던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우리와는 악연이지만), 브레메를 불러 모았다. 독일은 유로 88 준결승에서 반 바스텐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네덜란드에게 우승컵을 내주었는데 그 설욕전이 세리에 A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은 밀란의 시대였다. 아리고 사키 감독의 이른바 ‘밀란 제너레이션’. 1988년 발롱도르 포디움에 세 명 모두 올라갔을 만큼 뛰어난 활약을 펼친 오렌지 삼총사는 게르만 삼총사를 압도했고 밀란은 수년 동안 유럽무대를 평정했다. 이렇듯 유럽 최강이었던 밀란에게 계속 밀리면서 울분에 차 있었던 인테르 팬들은 그동안의 울분을 씻어낼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6강전.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네덜란드와 독일의 빅매치가 성사됐다.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이 16강전이 펼쳐진 곳은 공교롭게도 밀란과 인테르의 홈구장인 산시로(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 밀란의 오렌지 삼총사와 인테르의 게르만 삼총사가 당연히 양국의 주축 선수였다. 197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맞붙은 이후 네덜란드와 독일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앙숙관계였는데, 독일은 유로 88 준결승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했고 밀란을 이길 수없었던 인테르 팬들은 게르만 삼총사가 뛰던 독일을 열렬하게 응원했다.
네덜란드의 레이카르트와 독일의 루디 푈러가 신경전을 벌이다 둘 다 퇴장당하는 등 예상대로 경기는 엄청나게 거칠고 치열했다. 결과는 게르만 삼총사의 일원인 클린스만과 브레메가 한 골씩을 기록한 독일의 2-1 승리. 독일은 유로 88 준결승에서의 패배를 설욕했고 인테르 팬들은 마치 인테르가 밀란을 꺾은 것처럼 기뻐했다.
잉글랜드 축구에 훌리건이 있다면 유럽 대륙에는 울트라스가 있다. 울트라스는 축구자체가 삶의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축구에 미친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팀을 응원하거나 상대 팀을 조롱하는, 아주 퀄리티 높은 배너, 카드 섹션, 응원가를 만들고 일사불란하게 상대 서포터스를 공격하는 등 아주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냥 난동을 부리는 잉글랜드 훌리건과는 구별된다. 이 울트라스 문화가 어디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일반적으로는 1950년~1960년대 사이에 이탈리아의 세리에 A에서 시작되어 1980년대에 전 유럽으로 퍼져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밀란과 인테르도 리그 최고의 명문팀답게 아주 극렬한 울트라스를 보유하고 있다. 이탈리아 세리에 A는 홈팀의 응원단이 남쪽 좌석, 원정팀 응원단이 북쪽 좌석을 차지하게 되는데, 같은 구장을 쓰고 있는 밀란과 인테르는 홈과 어웨이 경기 때마다 좌석을 바꾸지 않고 밀란이 남쪽, 인테르가 북쪽 좌석을 고정적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이 때문에 '쿠르바 수드' (Curva Sud·남쪽 좌석)는 밀란의 서포터스를, '쿠르바 노르드' (Curva Nord·북쪽 좌석)는 인테르의 서포터스를 지칭하게 되었다.
예술과 패션의 고장 밀라노를 연고로 한 구단답게 양 구단의 울트라스가 펼치는 카드섹션 응원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그 퀄리티는 말할 것도 없고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감탄을 자아내면서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가 열릴 때마다 이번엔 어떤 카드섹션이나 배너가 나올지 기다려질 정도이다. 밀란은 인테르를 향해 배신자, 반역자 프레임을, 인테르는 정통성을 의식해서인지 진정한 밀라노의 지배자는 자신들이라는 글귀를 자주 들고 나온다.
밀란과 인테르의 경우는 축구 이외에 종교적, 민족적인 문제는 없었기 때문에 서포터스끼리 극렬하게 대립하는 일이 적었지만 유럽 전역에서 울트라스가 활발하게 활약하던 시기에는 잦은 충돌을 빚기도 했다. 2005년 4월, 밀란과 인테르는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격돌했는데 이미 1차전을 2-0으로 패배한 인테르는 2차전마저 세브첸코에게 선제골을 빼앗기고 끌려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후반 25분, 코너킥 상황에서 터진 캄비아소의 헤더 동점골이 석연찮은 파울 판정으로 취소되자 경기장은 들끓기 시작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UgCoud2xbc&t=25s
분노한 인테르 울트라스는 경기장에 홍염과 물병을 마구 투척하기 시작했다. 인테르 울트라스가 던진 홍염에 맞은 밀란의 골키퍼 디다가 그라운드에 쓰려졌고 수많은 홍염과 물병이 떨어진 그라운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경기는 결국 중단되었고 결과는 인테르의 몰수패. UEFA 역사상 가장 많은 20만 유로의 벌금이 내려졌고 인테르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첫 4게임을 무관중 경기로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 경기는 오랫동안 유럽축구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희대의 명장면을 탄생시켰다.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라운드를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 후이 코스타(밀란)와 마테라치(인테르)의 뒷모습이 사진 한 장으로 남은 것이다. 같은 도시를 연고로 하는 경쟁자이자 동업자인 두 팀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담은 이 사진은 이후 많은 축구팬들의 컴퓨터 바탕화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