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아 코마네치 (2)
1961년, 나디아 코마네치는 희대의 독재자 차우세스코가 통치하던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모두 집 근처 공장에서 일을 하던 노동자였는데, 밤늦게까지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어린 코마네치를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다. 코마네치가 다섯 살이 되던 해, 그녀의 부모님은 코마네치의 왕성한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녀가 밤에 지쳐 곯아떨어지도록 하기 위해 체조 교실에 보냈는데, 이 선택이 훗날 세계 체조 역사를 바꾼 대 사건이 되었다. 코마네치는 체조에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 귀여운 꼬마 요정은 체조 교실에 다닌 지 1년 만에 불세출의 체조 코치 벨라 카롤리의 눈에 띄게 된다.
벨라 카롤리는 단번에 그녀의 재능을 발견했고 부모님을 설득해 자신의 체조 학교로 데리고 왔다. 코마네치의 나이 여섯 살 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섯 살 꼬마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옥 훈련이 시작됐다. 벨라 카롤리는 수많은 체조 스타를 배출한 체조 역사상 가장 성공한 코치였지만 그의 훈련 방식은 훗날 아동학대 논란이 있을 정도로 가혹했으며 스포츠를 통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오로지 성적에만 몰두하던 차우세스코 정권은 벨라 카롤리의 강압적이고 혹독한 훈련 방식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불과 10살도 안된 많은 소녀들이 하루에 10시간 이상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야만 했고 유연성을 기르고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아주 지독한 다이어트를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충분한 식사는 제공되지 않았고 심지어 물도 제한됐다. 코마네치는 훗날 너무 배가 고파 치약을 먹기도 했으며 심지어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변기 물을 마신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이런 혹독한 훈련 과정에서 낙오된 아이들은 가차 없이 체조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살아남은 아이들은 오직 체조를 위한 기계로 변모해 갔다.
코마네치가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린 건 1972년, 공산권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대회에서였다. 그녀는 만 열 살의 나이로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1973년과 1974년 같은 대회에서는 체조 전관왕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동구권 최강자가 됐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여자 기계체조 3관왕이자 그 유명한 코르부트 플립을 만들어 낸 소련의 코르부트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지 전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코마네치의 대관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2ukgIEqw3gY
1976년 3월, 몬트리올 올림픽을 불과 4개월 남겨 놓고 코마네치는 올림픽 전초전 격인 아메리칸 컵에 출전했다. 이 대회를 통해 올림픽에 대비한 마지막 점검을 하고자 했던 코마네치는 예상대로 여자부 우승을 차지했고 남자부는 1984년 LA 올림픽에서 미국 선수로서는 최초로 기계체조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는 바트 코너가 정상에 올랐다. 시상식이 끝난 후 기자들은 바트 코너에게 코마네치의 볼에 키스를 해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하게 되는데, 각각 17세와 14세에 불과했던 바트 코너와 코마네치는 수줍어하며 기자들의 요구에 응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운명적인 사진 한 장을 남기게 된다. 사진 속 수줍어하던 소년과 소녀가 20년 후 운명적인 인연을 이어 가리라고는 이 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76년 7월 17일. 마침내 몬트리올 올림픽이 시작됐다. 몬트리올 올림픽의 최고 스타는 단연 나디아 코마네치. 그녀는 세계 기계체조 역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았으며 단체전과 개인종합, 그리고 종목별 결승에 나서 주 종목인 이단평행봉과 평균대에서 무려 7번의 만점을 받으며 3관왕에 올랐다. 새로운 체조 여왕의 등장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코마네치는 단숨에 세기의 연인이 됐다. 그녀의 인기는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kKdiwXuBDrw
코마네치가 체조계에 남긴 충격은 정말 대단했다. 그녀는 체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칭송받았으며 몬트리올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체조경기가 열릴 때마다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코마네치의 연기는 신화가 되어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2004년, 코마네치가 최초로 만점을 받은 몬트리올 올림픽 이단평행봉 연기 영상을 모티브로 아디다스가 ‘Impossible is Nothing'이라는 광고를 선보이면서 그녀의 신화는 21세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c0L9J2C-Kk4
몬트리올 올림픽이 끝난 후 코마네치는 당연히 루마니아의 국민적인 영웅이 됐다. 스포츠를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던 차우셰스쿠 정권은 그녀를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적극 활용했고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이 작고 여린 루마니아의 국민 영웅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차우셰스쿠에게 빼앗긴 코마네치는 매우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고 강도 높은 감시와 통제 속에 정권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의 성공과 인기는 코마네치에겐 오히려 불행이었다. 하지만 이 불행은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