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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키스

나디아 코마네치(4)

by 미친 PD

1989년 11월 26일 밤, 루마니아 비밀경찰 ‘세쿠리타테’의 도청이 걱정되었던 코마네치는 가족들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6명의 젊은 루마니아 인들과 함께 탈출을 시작했다. 이들은 국경 근처 마을까지는 준비한 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국경 부근부터는 루마니아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칠흑 같이 어두운 산길을 걸어야 했다. 추운 날씨로 길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코마네치는 사력을 다해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일출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녀는 반드시 루마니아의 국경을 넘어야 했다. 만약 ‘국경을 넘기 전에 날이 밝는다면...’ 코마네치에게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다.

차우셰스쿠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루마니아 비밀경찰 세쿠리타테.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밀착 감시했고 숙청했다. 코마네치는 그들의 감시를 피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여섯 시간쯤 지났을까. 코마네치 일행이 추위, 굶주림과 사투를 벌이며 산을 넘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군인들이 나타났다. 코마네치는 두려움에 떨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든 것이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하지만 코마네치는 군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헝가리 말이었다. 코마네치 일행이 마침내 루마니아의 국경을 넘어 헝가리에 도착한 것이다.

코마네치는 험준한 산을 넘어 헝가리로 탈출했다. 사진은 1989년 민주화 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의 철조망을 자르는 헝가리 국경수비대

헝가리 국경수비대는 코마네치에게 신원을 밝힐 수 있는 증명을 요구했지만 코마네치는 당시 여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이 나디아 코마네치임을 밝혔고 코마네치라는 이름을 들은 헝가리 국경수비대는 술렁거렸다. 그들은 코마네치를 아주 극진하게 보호했다. 그리고 증명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코마네치라는 이름 하나로 코마네치 일행의 망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권도 없었지만 '코마네치'라는 이름 하나로 망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만큼 코마네치가 가지는 세계적인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코마네치는 오스트리아로 옮겨져 그곳에서 망명 브로커 콘스탄틴 페니를 만났고 오스트리아 미국 대사관은 그녀가 미국으로의 망명 의사를 밝힌 지 두 시간여 만에 미국행 1등석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주었다. 코마네치는 루마니아를 탈출한 지 불과 3일 만에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됐다.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코마네치의 탈출은 대성공인 것처럼 보였다.

망명 브로커 콘스탄틴 페니(우)와 만난 코마네치. 페니와의 만남은 코마네치의 인생을 완전히 추락시켰다.

코마네치의 망명 소식은 루마니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지속적인 경기 침체와 정치적 자유 말살로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루마니아 인들은 코마네치의 탈출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고 모두 거리로 뛰쳐나왔다. 마침내 루마니아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코마네치의 탈출이 루마니아 혁명을 이끌어 냈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트리거가 된 것은 분명했다. 혁명의 불길은 거세게 타올랐다.

차우셰스쿠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루마니아 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루마니아 혁명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도청, 미행 등의 감시와 무자비한 숙청으로 차우셰스쿠 정권을 유지시켰던 비밀경찰 ‘세쿠리타테’가 시위대에 발포를 하며 진압에 나섰지만 차우셰스쿠가 ‘세쿠리타테’에게만 온갖 특혜를 주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루마니아 인민군이 시민들 편에 서자 전황은 달라졌다. 혁명군과 ‘세쿠리타테’ 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차우셰스쿠 부부는 결국 체포되었고 또 다른 반격의 불씨를 없애기 위해 차우셰스쿠 부부의 총살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자유를 향한 코마네치의 작은 날개 짓은 커다란 태풍으로 변하여 그렇게 단단하게만 보였던 독재정권을 하루아침에 무너트렸다. 34년 간 루마니아를 암흑으로 이끌었던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이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루마니아 인민군이 시민군 편에 선 것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체포된 차우셰스쿠 부부는 수 백 발의 총탄 세례를 받았으며 이 모습은 TV로 생중계 됐다.

한편, 코마네치가 루마니아를 탈출하여 미국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은 미국인들을 열광시켰으며 그녀가 도착할 뉴욕 JFK 공항은 코마네치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코마네치가 입국장에 등장하자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1981년 벨라 카롤리의 망명 이후 차우셰스쿠 정권의 엄혹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공식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던 코마네치의 모습은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깜찍하고 귀여운 금발 소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는 코마네치. 하지만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의 모습은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깜찍한 체조 요정이 아니었다.
입국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코마네치(우)와 콘스탄틴 페니(좌)

체조를 그만둔 후 코마네치의 체중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트렌드에 한참 뒤처진 화장법과 서툰 영어도 그녀를 매우 촌스럽게 만들었다. 완벽함을 만들어 냈던 세기의 연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오로지 이미지로만 그녀를 추앙하고 있었던 미국인들은 그런 코마네치의 모습에 등을 돌렸다.

체조를 그만둔 후 몰라보게 살이 찐 모습과 다소 투박한 화장법과 서툰 영어는 그녀를 촌스럽게 만들었다.
자신의 불륜설을 해명하고 있는 코마네치. 코마네치의 평판은 유부남인 콘스탄틴 페니와의 불륜설로 급격하게 하락했다.

더 큰 문제는 망명 브로커인 유부남 콘스탄틴 페니와의 불륜설이었다. 코마네치의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불륜 의혹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페니의 부인 마리아는 TV에 나와 남편과 코마네치가 불륜관계이며 이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났다고 울부짖었다. 코마네치에 대한 평판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녀는 싸구려 행사를 다닐 수밖에 없었고 속옷 모델과 남성잡지 화보 촬영을 해야만 했다. 세기의 연인이었던 코마네치의 완벽한 몰락이었다.

속옷 모델을 하고 있는 코마네치. 간판 맨 아래 만점을 받았던 코마네치의 이력이 처연해 보인다.
코마네치라는 이름은 결국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이용되었다.

콘스탄틴 페니와 함께 다니는 코마네치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그녀와 함께했던 벨라 카롤리 코치였다. 카롤리는 코마네치가 미국에 오자 반가운 마음에 연락을 했는데 콘스탄틴 페니가 중간에서 그녀와의 연락을 계속 막았던 것이다. 카롤리 코치는 지인을 시켜 코마네치와 함께 할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가 있다며 그녀와 만나도록 했고, 페니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코마네치는 페니로부터 감금과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여섯 살 때부터 인생을 함께한 벨라 카롤리와 코마네치(왼쪽 첫 번째). 카롤리는 코마네치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증의 관계였다.
미국 체조 대표팀 훈련장에서 다시 만난 코마네치와 벨라 카롤리

콘스탄틴 페니는 처음부터 코마네치를 활용해 돈을 벌 생각이었다. 계획한 대로 코마네치가 미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하자 그는 본색을 바로 드러냈고 코마네치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루마니아로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다. 그리고 그녀가 원치 않았던 일들을 강요하며 돈을 벌도록 했고 그 돈을 모두 갈취했다. 그가 갈취한 금액은 무려 15만 달러에 달했다.

방송 인터뷰에 응한 코마네치와 페니. 코마네치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모든 악행이 들통나자 콘스탄틴 페니는 그동안 벌어들인 돈을 모두 챙겨 도망쳤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남편과 코마네치와의 불륜사실을 공개적으로 폭로했던 그의 부인 마리아가 이 도주행각에 함께 했다는 것이다. 페니 부부가 달아난 이후, 마리아의 불륜 폭로 역시 남편과 짜고 한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코마네치의 평판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그녀를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저지른 끔찍한 짓이었다. 자유가 철저하게 억압된 독재국가에서 태어나 오직 체조밖에 모르고 살았던 코마네치에게 세상은 너무나 무서운 곳이었다.

루미나이에서도 미국에서도 이용만 당한 코마네치. 공산국가에서 오직 체조밖에 모르고 살았던 코마네치에게 세상은 너무나 무서운 곳이었다.

목숨을 걸고 루마니아를 탈출했던 코마네치는 그토록 갈망했던 미국이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모두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코마네치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고 대인 기피증세에 시달렸다. 그녀에게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죽으란 법은 없었다. 모든 의욕을 잃고 은둔하고 있던 코마네치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한 남자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온 것이다.

1976년, 아메리칸 컵 체조대회에서 남녀 우승을 차지한 바트 코너(우)와 코마네치. 여기서 만난 인연이 20년을 이어갈 줄은 이때는 미처 몰랐다.

그는 1976년 아메리칸 컵 체조대회 시상식에서 코마네치의 볼에 키스했던 1984년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바트 코너였다. 코너는 코마네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루마니아 당국자들의 감시 속에 있었고 숱한 체조대회에서 스쳐 지나가면서도 마음 한번 전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바트 코너는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스포츠에는 명예와 영광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며 체조와 연을 끊고 살려고 했던 코마네치를 설득했다. 코너의 끈질긴 설득에 코마네치의 마음도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코마네치를 잊지 못하던 코너는 살아갈 힘이 없었던 그녀에게 함께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자고 제안한다. 그녀에게 그는 백마 탄 왕자였고 그에게 그녀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였다.
바트 코너는 평생을 연모해 왔던 코마네치와 마침내 결혼에 골인한다. 이 결혼식은 루마니아 전역에 생중계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바트 코너와 코마네치는 오클라호마에서 함께 체조 아카데미를 열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인 두 사람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체조 꿈나무들이 모여들었고 사업은 크게 성공했다. 사업 파트너였던 두 사람은 이내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1996년 4월 27일, 두 사람은 마침내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루마니아 정부는 이 결혼식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했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코마네치의 모습은 루마니아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차우셰스쿠가 머물렀던 대통령 궁에서 열린 피로연에서 막 부부가 된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했다. 1976년, 아메리칸 컵에서 볼 키스를 한 소년과 소녀가 꼭 20년 만에 다시 키스를 하게 된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14세 소녀는 이때 볼 키스를 한 17세 소년이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임을 알았을까?
두 소년 소녀는 꼭 20년 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뜨거운 키스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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