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을 마치며 : 에필로그
지난 시즌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로 1000만 관중을 돌파한 KBO리그는 불가능이라고 여겨지던 1200만 관중을 돌파하며 올 시즌도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시즌 종료 후 시작된 포스트시즌에서는 정규리그 164만 관중을 동원하며 전체 관중 수 1위에 오른 4위 삼성 라이온즈가 와일드카드전에서 5위 NC 다이노스를 꺾은데 이어 준플레이오프에서 3위인 SSG 랜더스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인기몰이를 이어갔다. 정규리그 마지막까지 LG 트윈스와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을 펼치다가 막판 뼈아픈 역전패를 당하며 2위로 밀린 한화 이글스가 삼성의 플레이오프 상대였다.
코디 폰세와 라이언 와이스라는 올 시즌 리그를 평정한 원투펀치를 보유한 한화 입장에선 와일드카드부터 준플레이오프까지 이미 많은 경기를 치르고 올라온 삼성을 힘으로 몰아붙일 것으로 보였지만 1차전부터 예상은 빗나갔다. 하루 전날 몸까지 다 푼 상태에서 세차게 내린 가을비로 인해 경기가 취소된 탓에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었는지, 시즌 17연승이라는 KBO리그 신기록을 세웠던 한화의 에이스 폰세는 6이닝 7피안타 6실점. 최악의 피칭을 했다. 하지만 2회에 터진 문현빈의 싹쓸이 3타점 2루타, 6회에는 채은성의 결정적인 적시타가 터지면서 한화는 경기를 뒤집었고 구원 등판한 문동주가 2이닝을 1피안타로 깔끔하게 막으면서 첫 승을 따냈다.
하지만 다음 날, 믿었던 와이스가 또다시 무너졌고 삼성의 최원태는 7이닝을 4피안타 1실점으로 한화 타선을 묶으며 인생투를 펼쳤다. 플레이오프 전적 1승 1패. 플레이오프를 빨리 끝내야 했던 한화는 3차전 5회초 노시환의 역전 투런 홈런이 터지자 바로 선발 류현진을 내리고 6회부터 문동주를 투입, 5-4 한 점 차 승리를 지켜냈다. 문동주는 16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선보이며 무려 4이닝을 퍼펙트하게 막아냈다. 플레이오프 전적 2승 1패. 이제 한화는 1승만 추가하면 만년 꼴찌의 설움을 딛고 1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경기 후 발표된 4차전 한화의 선발은 에이스 폰세가 아닌 정우주였다. 물론 5일 로테이션을 도는 정규시즌에서는 선발투수가 최소 4일의 휴식을 취하게 되지만 지금은 가을이었다. 3일밖에 쉬지 못했다고 폰세를 투입하지 않고 불펜 데이를 생각하다니, 현재보다는 이후를 생각하는 김경문 감독의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용병술이었다. 게다가 한화는 4차전에 플레이오프를 끝낸다면 한국시리즈까지 꿀맛 같은 3일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19살의 신인 정우주는 리그 최강 삼성 타선을 상대로 3.1이닝 3피안타 무실점이라는 깜짝 호투를 펼쳤고 문현빈의 석점 홈런까지 터지면서 점수는 4-0, 이제 한화는 남은 이닝을 3점 이내로만 막아내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처음 찾아온 6회말 위기에서 김경문 감독이 꺼내든 카드는 황준서. 황준서는 기대와는 다르게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1실점을 한 뒤 주자를 두 명이나 쌓아두고 내려갔다. 점수는 4-1 석점 차.
김경문 감독은 여기에서라도 폰세를 올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정규시즌 마지막부터 포스트시즌까지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며 심한 압박을 받고 있던 마무리 김서현. 어린 선수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선택은 최악이었다. 이미 이승엽의 후계자로 칭송받고 있던 삼성의 김영웅은 여기서 결정적인 동점 쓰리런 홈런을 때려냈고 7회에는 역전 쓰리런 홈런까지 치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내일이 없는 포스트시즌에서 내일을 생각하던 한화 더그아웃의 완벽한 실패였다. 결국 플레이오프는 5차전까지 가게 되었고 한화는 뒤늦게 폰세와 와이스를 모두 투입하며 플레이오프를 승리로 이끌었다. 1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결국 한국시리즈 1차전과 2차전에 한화가 자랑하는 원투펀치를 모두 기용하지 못하는 상황. 왠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시리즈. 시즌 성적만 놓고 본다면 마운드에선 한화가 전혀 밀릴 게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체력과 경험. 플레이오프 5차전까지 혈투를 벌이고 하루 밖에 쉬지 못한 한화 투수들은 지쳐있었고 심지어 한국시리즈를 뛴 경험도 없었다. 이 때문에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한화의 젊은 투수들은 한국시리즈에서 제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마무리 김서현의 극심한 부진이 드러나 보였지만 김범수, 황준서, 조동욱, 박상원 등 필승조 그 누구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면 충분한 휴식을 취한 LG의 주축 투수들의 공은 힘이 있었다.
한화 투수들의 제구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스트라이크를 넣기 급급한 공들은 위력을 잃었다. 특히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유인구를 선택하지 않고 하이 패스트볼을 유도했지만 모두 한가운데로 몰리면서 결정적인 적시타를 맞은 것이 너무나 뼈아팠다. 플레이오프 4차전 김영웅에게 맞은 3점 홈런, 한국시리즈 4차전 박동원에게 맞은 투런 홈런, 그리고 김현수에게 맞은 역전 2타점 적시타가 모두 그 공이었고 왜 한화의 배터리는 유리한 볼카운트마다 그 공을 고집했는지 알 수 없다. 더그아웃에서는 그 사인을 낼 때 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플레이오프의 영웅이었던 문동주도, 산전수전 모두 겪은 류현진도 부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어쩌면 마지막 가을일지도 모르는 류현진의 부진은 의외이면서도 안타까웠다. 그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 우리들의 한 시대가 저무는 것 같아서. 한화는 오직 폰세와 와이스, 두 외국인 선수들만이 제 역할을 했다. 제 아무리 최강 원투펀치라지만 두 선수만으로 리그 1위 LG를 4번이나 이길 수는 없었다.
야수 쪽에서는 그 차이가 훨씬 심했다. 눈에 보이는 타격 지표는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수비력과 주루플레이 그리고 급박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판단하는 능력 모두 압도적으로 LG가 우위였다. 양 팀의 전력을 풀로 가동하는 가을야구에선 이런 조그마한 차이들이 쌓여 결국 승리 팀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한화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시리즈였다.
다소 무리하더라도 전력에서 밀리는 팀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총력전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KBO의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업셋을 한 팀들은 모두 미친 활약을 한 선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한국시리즈는 그런 선수를 찾아볼 수가 없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3일 쉰 폰세를 투입했더라면. 가을 야구에서 이런 정도의 무리는 아주 흔한 일이다. 폰세가 만약 실패하더라도 5차전엔 와이스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플레이오프를 4차전에 마무리했다면 한국시리즈의 양상은 매우 달랐을 것이다. 한국시리즈에선 와이스 - 류현진 - 폰세로 선발을 운영하면서 문동주를 전천 후 불펜으로 돌렸다면. 선발투수는 3명이면 충분했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3일 휴식 후 피칭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LG를 이길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전력의 차이가 제법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이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년 만에 한국시리즈 무대에 오른 한화가 반드시 LG를 꺾을 것이라고 생각한 한화 팬들은 적을 것이다. 다만 끝까지 총력전을 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을 뿐. 오랜만에 올라온 한국시리즈를 하루라도 더 봤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팬들은 가을을 걷고 있는데 코칭스태프는 계속 정규시즌을 걷고 있었다. 만약 총력전을 펼쳐 장렬하게 패했다면 많은 한화팬들은 오히려 박수를 보냈을 것이라 확신한다. 스포츠란 그런 것이다.
2년 만에 다시 통합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제 완전히 암흑기를 이겨내고 명실상부한 리그 최강팀 반열에 올라선 LG 트윈스에게 축하를 보낸다. 그리고 19년 만에 올라온 한국시리즈에서 아쉽게 패했지만 단연 2025년 KBO리그의 주인공이었던 한화 이글스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분명 오늘의 패배가 내일엔 큰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전 LA 다저스의 감독이었던 토미 라소다의 유명한 말입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야구 PD로 살아왔지만 시즌이 끝날 때마다 찾아오는 상실감과 허무함, 그리고 반드시 함께 찾아오는 지독한 감기 몸살도 여전했습니다. 아무런 공지도 없이 연재를 이어가지 못해 혹시라도 기다리신 독자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지난 여름부터 이어왔던 '그때, 우리를 미치게 했던' 연재를 마치려고 합니다. 스포츠는 그 이면에 그 무엇보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스포츠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는 분들께도 조금이나마 쉽고 흥미롭게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저의 글이 그 목적을 이루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던 야구 중계와 브런치 연재가 같이 끝났으니 이제 잠시 쉬어 가려합니다.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도 만나고 잘 보지 못했던 영화도 원 없이 보려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년 봄 출간 예정인 새로운 저의 책 원고를 써야 합니다. 원고 의뢰를 받고 출간계약을 맺은 지 한참 지났는데 아직 여러 가지 핑계로 한 글자도 쓰지 못했습니다. 원고의 구성이 어느 정도 끝났을 때, 새로운 연재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물론 브런치에는 자주 들려 여러 글벗님들의 글은 열심히 읽겠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꼭 1년이 지났습니다. 누가 내 글을 읽을까 걱정하며 첫 글을 쓴 기억이 선명합니다. 하지만 지난 1년, 저는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저의 영원한 글벗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런 공간을 만들고 예쁘게 꾸며준 브런치팀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셔요. 다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