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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민 Jul 25. 2024

키에르케고르를 만나다;

믿음에 관하여

일러두기

이 글은 작가가 한 학기 동안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대해 공부하여 학기말 발표를 하기 위해 준비한 발표 스크립트입니다. 짧은 지식과 지혜의 수준을 감안하여 주시고, 평범한 고3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요 설명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한 학기 동안 ‘키에르케고르를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창의활동을 진행한 정하민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 학기 동안 19세기 근대 실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에 대해 공부하였습니다. 특별히 평소 가지고 있던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필두로 그가 믿음에 관해 다룬 대표 저서 중 하나인 ‘공포와 전율'을 읽고 파헤쳤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우선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사상인 실존의 3단계에 대해 설명드린 뒤 공포와 전율의 내용을 바탕으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발표를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조금 어렵고 난해할 수 있으며, 저 또한 그의 사상을 완벽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배우고 느낀 점이 있기에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준비했으니, 즐겁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 실존의 3단계 설명하기 


키에르케고르는 현대 실존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가리켜 실존이라고 부른 최초의 철학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흔히 ‘실존주의'라고 한다면, 기독교와의 대립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실존주의'라는 단어를 들으면 반감을 일으키곤 합니다. 하지만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인 키에르케고르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실존주의 철학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실존이란 무엇일까요? 실존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존재자의 존재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자의 원래 존재 목적을 본질이라고 할 수 있죠. 예를 들자면, 제가 들고 있는 이 마이크의 본질은 소리를 받아서 수신기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몽둥이의 본질은 때리는 것입니다. 만약 마이크로 사람을 때리면 몽둥이로서 실존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실존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탐구하는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을 크게 3단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바로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그리고 종교적 실존입니다. 먼저 심미적 실존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심미적 실존


대표적인 예로는 카사노바, 돈 후안 등이 있습니다. 심미적 실존에게는 찰나의 즐거운 흥분만이 중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으며, 오직 순간순간의 향락만을 중시합니다. 따라서 그의 인생은 찰나적인 순간들의 이어짐에 불과할 뿐입니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지만, 심미적 실존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부정합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향락만이 중요합니다. 


심미적 실존에게는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한없이 지루하고 따분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미적 실존은 삶을 한없이 가볍고 즐겁게 살고 싶어 합니다. 심미적 실존에게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어리석게도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씌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미적 실존은 지극히 유혹적입니다. 그 누가 심미적 실존을 저속한 삶으로 단죄하면서 자신은 그런 삶을 원한 적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심미적 실존은 자유로운 실존이 아니고,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변덕스러운 기분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즐거운 기분을 추구합니다. 그에게는 즐거운 기분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대상에서 느끼는 즐거운 기분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그 대상에 대한 권태로 바뀝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즐거운 기분을 새롭게 불러일으켜 줄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심미적 실존은 마침내는 벗어나기 어려운 깊은 권태와 우울에 빠집니다.


그런데 심미적 실존은 왜 우울에 빠질까요? 이는 우리의 정신은 원래 감각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감각적 향락 이상보다 높은 것을 추구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한갓 감각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정신은 우울에 빠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키르케고르는 우울을 감각의 수단으로 영락해 버린 정신이, 자신의 초라한 처지에 대해 짜증을 내는 정신의 히스테리라고 정의합니다.


윤리적 실존


심미적 실존은 그러한 자신의 삶에 절망을 느끼고 윤리적 실존으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윤리적 실존은 도덕적 선을 실현하는 데 집중하는 구심적인 삶입니다. 윤리적 실존은 항상 자신의 중심을 지키면서, 이러한 중심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합니다. 


 따라서 윤리적 실존이 추구하는 도덕적 선은 윤리적 실존에게도 하나의 당위적인 명령으로서, 즉 의무로서 나타납니다. 윤리적 실존은 이 의무를 실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무는 어떤 특별한 의무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일반적이고 평범한 의무입니다. 윤리적 실존은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의무나 어머니의 의무를 다하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교수의 의무나 학생의 의무를 다하려고 합니다. 심미적 실존에게 의무란 귀찮은 구속에 불과한 것이지만, 윤리적 실존에게 의무는 숭고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순수하게 윤리적 실존으로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우리 대다수는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훌륭한 시민이고 훌륭한 남편이고 훌륭한 아내일지 모르지만, 절대적인 윤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죄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윤리적 실존으로 살고 싶어 하지만, 심미적 실존의 유혹에 자주 끌립니다. 위에서 살펴본 심미적 실존도 윤리적 실존도 하나의 이념적인 추상물입니다. 현실에서는 철저하게 심미적 실존으로 사는 사람도 없고, 철저하게 윤리적 실존으로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있더라도 극소수일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이 섞여 있는 삶을 삽니다.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중 어느 것의 비중이 더 크냐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중심주의와 이기심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이는 윤리적 실존도 마찬가지입니다. 윤리적 실존에서는 자신의 의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식이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무한한 체념에 빠집니다. 


종교적 실존


종교적 실존의 단계는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고 ‘절대자’ 앞에 ‘단독자'로서 서는 단계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실존을 종교성 A와 종교성 B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종교성 A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종교입니다. 이에 반해 종교성 B는 신과 인간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 거리가 있다고 보는 종교를 가리킵니다. 종교성 A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 그리고 불교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종교성 B는 기독교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납니다. 종교성 A는 인간의 내면에 진리 자체인 신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잠재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일깨우기만 하면 됩니다. 이에 반해 종교성 B는 진리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다고 봅니다. 종교성 A에서 스승은 우리 내면에 이미 잠재해 있는 진리를 일깨우는 사람입니다. 이에 반해 종교성 B에서 스승인 예수는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진리를 계시를 통해서 가져다주는 구세주입니다. 종교적 실존 B는 완전무결하고 의로운 신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이미 간직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 비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기독교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은 지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신은 각 개인이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에게 자신을 내맡길 때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신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신에 대한 풍부한 지식 속에서 자신이야말로 최고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키르케고르에게 기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렇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이렇게 온몸으로 주체적으로 이해되는 진리이지 객관적인 지성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학문을 통해서 파악될 수 있는 이론체계가 아니라 내면적인 사건입니다.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객관적인 지성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맑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을 객관적인 지성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신을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키에르케고르를 읽을 때도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가리키는 사태와 내면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키르케고르를 지적으로 가 아니라 정열을 다 해 읽어야 하며, 그를 읽음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키에르케고르가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죠. 


아브라함 이야기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종교적 실존에서 윤리적인 것의 유혹을 받는 인물임)

이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에 대해 설명드렸으니, 제가 이번 창의활동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던 ‘믿음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을 아시나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산제물로 바치려 하였던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은 건너뛰도록 하겠습니다. 여기는 드리미학교니까요. 아브라함은 앞서 설명드렸던 실존의 3단계 중 어느 단계에 속하는 사람일까요? 네 바로 종교적 실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서 발제한 부분이나 에세이 인용)

흔히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근데 그가 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까요? 단순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그저 아브라함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무언가를 하나님께 바치려 하였다는 그 아브라함의 행위를 두고 깊게 통찰하려 하지 않고 그저 믿음의 조상이라는 단어로 퉁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그 아브라함의 행위와 그 사건에 대해 깊게 묵상하고 통찰하여 그의 저서인 공포와 전율에 저술하였습니다.


종교적 실존에게 있어 유혹은 윤리적인 것입니다. 윤리적인 것은 그것이 정말 윤리적이라면, 보편적인 것입니다. 절대자 앞에 단독자로 선 자로서는 윤리적인 것에 그러니까, 보편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를 통해 그 보편적인 것 위에 서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해 이삭을 산제물로 바쳐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논의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이 드니까요. 아버지로서의 보편적 윤리는 당연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을 바치려는 그 행위는 그 보편적 윤리에 어긋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그 길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윤리적인 것에 대한 유혹을 받았을까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가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 가운데 중에서도 한결같이 믿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삭을 요구하시면 그는 언제든지 이삭을 기꺼이 바칠 생각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요구하시지 않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믿음으로 인해 이삭을 돌려받은 것이죠. 


윤리적인 것은 그것이 정말로 윤리적인 것 인 것에 한해서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타당하죠. 그리고 그것이 윤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신 적입니다. 윤리적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행위는 윤리적인 것인 걸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가 윤리적인 것이라면 아브라함은 그저 살인자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위에는 윤리적인 것이 멈춰있습니다. 발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의무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무란 윤리적인 것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란 말일까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립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앞서 설명했듯이 믿음이란 윤리적인 것, 그러니까 보편적인 것보다도 높이 있다는 역설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윤리적인 것 보다도 높은 곳에 존재하는 그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믿음은 역설입니다. 믿음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그러니까,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 부조리한 것에 대한 일체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는 그 행위가 결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편적 윤리로써는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의 윤리입니다. 이러한 윤리적인 것의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보였기에 그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것은 윤리적으로 표현하자면 살인미수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보편적인 것보다 높은 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실존은 그 보편적인 것 위에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로서 존재하여야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보다 높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설명을 용납하지 않는 역설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 역설 속에 들어갔는가는, 어떻게 그가 이 역설 속에 언제까지 머물렀는가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엄청난 역설인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듯이 역설적인 것이므로 개별자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 결코 자기를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1장 26절”


누가복음의 이 구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적 실존의 개별자가 자신의 구원이 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 즉, 윤리적인 것의 표현으로써는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및 질의응답

여러분은 키에르케고르가 설명한 실존의 단계 중, 어느 실존의 단계에 머물고 계시나요?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의식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 믿음의 운동을 하는 사람을 살아생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 자신또한 그렇고요. 우리는 믿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종교적 실존에 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믿음보다 나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 절대자와의 절대적인 관계에 있어서 저희는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저는 한 학기 동안 믿음에 관해 공부하였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철학을 독자들이 그저 머리로만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진정한 이해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 인생의 평생의 과제입니다. 그저 믿음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첫 단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믿음보다 나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정말로 무서운 역설을 내포하고 있고, 진심이 아닌 전심으로 그것을 갈망할 때에 경함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인 공포와 전율에 다음과 같이 믿음을 표현합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정열이고, 믿음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최고의 정열이다. 한 인간의 생애는 이 과제를 수행하기에도 항상 벅차다.” 


이상으로 키에르케고르를 만나다 부제 믿음에 관하여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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