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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n 13. 2024

01. 해맑은 유기견과의 첫 만남

운명이 이런 것일까. 나는 그날 거듭된 우연 끝에 녀석을 만났다.


대학교 4학년 시절, 강의 두 개가 연달아 휴강되어 모처럼 낮 시간에 집에 있는 날이었다. 함께 사는 엄마는 직장에, 동생은 학교에 가고 혼자였다. 시원한 가을바람에 취해 빈둥거리고 있는데 아파트 안내 방송이 나른한 오후의 정적을 깼다.

“오늘은 관리비 납부 마감일입니다. 아직 관리비를 납부하지 않은 세대는 오늘까지…”

매달 꼬박꼬박 내던 아파트 관리비를 어째서인지 그 달에는 내지 않고 있었다. 방송을 듣고 관리비 고지서를 찾아 여기저기 뒤적였지만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방송에서 이런 내용이 흘러나왔다.

“관리비 고지서를 분실하신 세대는 관리사무소에 방문하셔서 고지서를 재발급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때까지는 고지서를 재발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당시 난 세상 모든 게 귀찮은 사람이었고, 평소라면 아파트 대단지를 가로질러 멀리 떨어진 관리사무소까지 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종이에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분명 집안 어딘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더 찾아볼 생각은 않고 고지서를 재발급받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강아지를 산책시킬 시간도 되었고, 날이 시원해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 우리 가족은 8살 된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었고, 그 아이와 함께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수도 없이 산책을 다녔지만 그쪽으로 가는 건 처음이었다. 사무소에 도착해 들어가려는데, 강아지가 멀리 어딘가를 보고 끙끙거렸다. 아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큰 기둥 뒤에 새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다리가 가늘고 털이 보송하면서도 삐죽거리며 나 있는 걸 보니 이제 막 자라고 있는 어린 강아지 같았다. 그럼에도 크기는 우리 강아지만큼 컸으니 한눈에 봐도 소형견은 아니었다. 녀석은 못 먹었는지 비쩍 마른 데다 털도 고르지 않아 볼품없었는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우리 강아지는 하얀 강아지의 냄새를 조금 맡더니 금세 흥미를 잃고 등을 돌렸다. 그런데 하얀 강아지는 사람을 좋아하는지 목이 졸리도록 두 발로 서서 낑낑거리며 내게 매달리려 했다. 위로 말려 있는 꼬리를 빠르게 흔들어대면서. 난 녀석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목덜미를 긁어 주고 인사를 나눴다. 녀석은 헥헥거리며 혓바닥을 집어넣을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내 손을 핥고 품에 안기려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갖다 버린 듯 한 그릇 두 개에 사료와 물이 채워져 있는 걸 보니 주인을 잃어버렸거나 주인에게 버림받은 듯 보였다. 


일단 녀석과 데면데면한 우리 강아지를 같은 기둥에 묶어 두고 관리사무소에 들어갔다. 고지서를 재발급받은 뒤 직원에게 하얀 강아지에 대해 물었다. 

“저 밖에 있는 강아지, 혹시 주인이 없는 건가요?”

“아, 예. 이 근처에서 떠돌아다닌 지 3일 정도 됐는데 사고 날까 봐 잡아서 묶어뒀어요. 혹시나 주인이 나타날까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 정도 지난 걸 보면 아무래도 버린 것 같네요. 내일 유기견 보호소로 보낼 예정이에요.”

어쩐지 '유기견 보호소'라는 말에 '안락사'라는 단어가 겹쳐 들렸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녀석에게 갔다. 녀석은 여전히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들며 목이 졸리면서도 매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뾰족한 주둥이를 '헤' 벌리고 혀를 내민 모습이 영락없이 해맑게 웃는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왠지 슬퍼 보였다. 순간 녀석을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동생과 함께 엄마 집에 얹혀살고 있던 데다가 생활비 역시 엄마가 모두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 식구를 들이려면 엄마의 허락이 필요했다. 8살 된 강아지가 있었으니 반려견을 키우는 데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엄마의 수입으로 세 식구에 강아지까지 함께 살기가 많이 쪼들리는 상황이었던 만큼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엄마가 강아지를 좋아하고 정에 약하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전화를 걸어 상황을 이야기했다. 내일이면 유기견 보호소로 가는데, 입양이 안 되면 안락사당할 수 있다는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결국 엄마의 이성도 나처럼 감정에 굴복하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 다시 관리사무소에 들어갔다. 

“문제가 없다면 일단 제가 저 강아지를 데리고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주인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연락처를 남길게요.”

직원이 어찌 나올지 긴장했으나 그는 심드렁하게 “그러세요.”라고 대답하고 자기 업무로 돌아갔다.

기둥에 묶인 리드줄을 풀자, 녀석은 더 심하게 날뛰었다. 며칠을 묶여있던 탓에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녀석은 이쪽저쪽 킁킁거리며 잘도 돌아다녔고, 그렇게 정신없이 한참을 걷다가 8살 강아지와 내가 모두 지친 뒤에야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녀석을 떠나보낸 뒤 가끔 아파트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갈 때면 녀석이 묶여 있었던 기둥에 손을 얹고 회상에 잠긴다. 지저분한 밥그릇과 물그릇, 낡아 해진 연두색 목줄, 헥헥거리는 소리, 내게 매달리는 앞발의 감촉, 환하게 웃는 녀석의 얼굴과 슬퍼 보이는 눈빛. 모든 게 생생하기만 한 그 운명의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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