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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l 07. 2024

8. 복수를 위해 친자식을 살해하다. <메데이아>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명인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 <메데이아>. 메데이아는 목적을 위해서는 잔인하리만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녀다. 마녀인 그녀는 이방인 이아손을 사랑하게 되어 그를 따라가기 위해 마법과 약물 등으로 이런저런 술수를 쓴다. 그런 그녀를 그녀의 아버지가 붙잡으려 하자, 친동생을 토막 내 살해한 뒤 바다에 던져 버린다. 아들의 시체를 수습하느라 쫓아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다른 전승에서는 자신을 데려가려는 친오빠를 살해했다는 내용도 있다. 결국 이아손을 따라와서는 그의 원수인 펠리아스를 살해하는데, 그 방법이 가관이다. 먼저 양을 토막 낸 뒤 삶아 어린양이 되는 마술을 펠리아스의 딸들에게 보여 준다. 그리곤 몸져누워 있는 펠리아스도 그렇게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딸들을 꼬드긴다. 결국 펠리아스는 딸들의 손에 토막 쳐진 뒤 삶아져 죽는다. 


정점은 역시 <메데이아>의 내용이다. 어느 날 이아손이 겁도 없이 바람이 나서는 왕 크레온의 딸과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메데이아는 일단 크레온의 딸에게 독이 묻은 옷을 보내 죽게 하고, 크레온 역시 그 과정에서 함께 죽는다. 그리고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사랑하는 자식들, 그러니까 자신의 친자식들을 살해한다. 그리곤 크레온을 저주하는데, 자식과 결혼 상대를 모두 잃고 실의에 빠진 크레온은 그녀의 저주에 따라 사고로 죽는다. 물론 메데이아가 죽였다는 전승도 있다. 그 뒤로도 메데이아는 아테네의 왕비가 되어 잘 살다가 자식의 권력을 위해 테세우스까지 암살하려 한다. 다행히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메데이아는 고향으로 도주하는데, 고향에 와서는 왕위를 찬탈하려던 삼촌을 죽인다. 이 천하의 악녀는 훗날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호사를 누렸다고 알려진다. 


이 화려한 악행들 중 작품 <메데이아>에서는 이아손의 외도 때문에 친자식을 살해하는 사건만을 다룬다. 그녀의 그 어떤 악행도 자기 자식을 죽인 것보다 더 잔인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악인이라도 자식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지는 법인데, 메데이아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저 남편에 대한 복수심 하나로 자식을 죽인다. 물론 메데이아도 자식을 죽이기까지 고통스러워하고 고민도 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저지른 악행에 비해 그녀의 고민과 고통은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메데이아는 잔인할 뿐만 아니라 극도로 영악하며 처세술에도 능수능란하다. 그녀의 높은 악명을 익히 알고 있던 크레온은 자신의 딸과 이아손을 결혼시키기로 한 직후 메데이아를 추방하려 했지만 그녀의 신들린 연기와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가 하루의 말미를 주고 만다. 그리고 그 하루가 모두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것.


자신을 버린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친자식들을 살해하는 메데이아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소포클레스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그려내고, 에우리피데스는 인간 그대로를 그려낸다'라고 했다. 실제로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안티고네 등만 보아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윤리적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한다. 설사 그것이 무모하거나 잘못된 선택일지언정,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반면 에우리피데스의 경우, <메데이아>만 보더라도 메데이아와 이아손, 크레온 모두 정상적인 사고로는 납득하기 힘든 행동과 선택들을 한다. 물론 나름대로의 이유들은 있지만,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까는 의문이다. 하지만 인간 개인으로 접근한다면, 누구든 그 어리석거나 잔인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래서 <메데이아>는 너무 현실적이기에 잔인하면서 불편하다. 등장인물을 욕하면서도 나 역시 저런 상황에서 비슷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도 인간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영화감독이나 드라마 감독들이 있다. 이들의 작품은 '보기 불편하고 불쾌한 작품'이라는 평과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을 동시에 받고는 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문학작품에서는 보다 관대하게 받아들여져 후자에 해당하는 평이 많다. 문학은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특화된 분야이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작품을 떠나 캐릭터의 매력만 보자면 호메로스나 소포클레스의 훌륭한 인간보다 에우리피데스의 적나라한 인간에 더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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