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냘의 사가>
<냘의 사가>는 중세 아이슬란드의 전승 문학이다. 사가(Saga)란 중세 북유럽 문학의 장르로, 내용은 전설, 신화, 서사시, 무용담 등이다. ‘사가’라는 말은 오늘날 이야기, 사건, 시리즈, 서사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번 작품인 <냘의 사가>는 사가 문학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으며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전승문학인 만큼 작가는 미상이며, 13세기에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사가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존 인물이며 벌어지는 사건들 역시 그러하다. 거기에 작가의 창작 역시 상당 부분 더해져 있어 역사서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당시 사회의 모습을 아주 상세하고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
중세 북유럽이라고 하면 덥수룩한 수염에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도끼를 휘두르는 호전적인 바이킹이 떠오른다. 실제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외형이나 성격 묘사들, 그리고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그러한 기질이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엔 <일리아드>나 <마하바라타>에서 보았던 거대한 전쟁과 치열한 전투, 전사들의 의무와 명예 이야기의 북유럽 버전을 기대했으나 실제 내용은 완전 딴판이다. 친족들 간에 벌어지는 혈투와 복수, 그 사건들을 수습하기 위한 법정 싸움, 반복되는 평화협정과 그것을 깨뜨리는 또 다른 혈투들의 반복이다.
그 와중에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악당인지,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더 정의로운지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상황에 따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등장인물에 대한 해석과 가치 판단, 사건의 양상 등이 매우 복잡 다양하다는 면에서 고대 서사시에 비해서는 현대 문학에 더 가깝다. 다만 개인의 감정 묘사가 적고 실제 사건들을 다루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맥락들이 존재한다는 점(하지만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면도 있다.)에서 그 과도기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다소 접하기 어려운 중세 문학의 특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냘의 사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요 등장인물을 파악하기에 앞서 더 중요하게 알아두어야 할 개념이 있다. 바로 ‘알싱(Althing)’이라는 기구인데, 알싱은 인류 최초의 의회이며 영국보다 300년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싱에서는 매년 ‘싱벨리르’라는 총회가 열렸고, 여기에 각지에서 지도자들이 모여 법률을 제정하거나 분쟁을 해결했다. <냘의 사가> 주요 등장인물들은 이 알싱의 구성원들이다. 알싱은 작품 전반에 걸쳐 여러 번 열리며, 작품의 핵심이 되는 사건들을 다루기 때문에 작품 전반에 걸쳐 중요한 무대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법정극을 방불케 하는 장면들이 자주 연출되며, 조금은 독특한 법 조항들과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동반된다. 이는 당시 아이슬란드에서 사법체계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 아이슬란드에서는 칼과 창으로 명예를 높였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혈투들이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처리해야 할 방법이 필요했고, 그래서 법 집행 기관이자 의사 결정 기관이 필요했던 것이 세계 최초 의회 탄생의 배경이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작품 제목이자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냘은 법률 지식이 해박하고 지혜로우며 예지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남자다. 그러니 법정 싸움이 자주 나오는 이 작품에서 뛰어난 인물로 등장하며 많은 활약을 한다. 다만 나이가 있기에 싸움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의 아들들과 친척들, 그리고 절친한 친구인 귄나르가 뛰어난 전사로 등장한다. 특히 귄나르는 냘과 함께 냘의 사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 인물로, 힘과 명예, 인품 등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훌륭한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냘과의 우정은 두 가문 간의 살해 사건들도 깨끗하게 덮을 정도로 돈독하다. 냘이 지혜를, 귄나르가 힘을 맡아 서로를 보완하며 둘은 작중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해결하고 명예를 얻는다.
그 과정에서 당시 아이슬란드 사회의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알싱에서 재판을 받아 합의에 이르고 피해자 가족에게 보상금을 건네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면 큰 명예를 얻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이다. 모욕을 당했든 복수이든 살인을 저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전투에서 승리해 상대를 죽인 뒤 재판을 받아 추방형과 같은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고 보상금으로 사건을 정리했다는 것은 그의 살인 행위에 정당성이 있었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귄나르는 냘의 도움을 받아 이와 같은 여러 사건들을 통해 큰 명예를 쟁취한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명예가 높아지면 시기를 피할 수 없다. 귄나르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냘의 사가>에서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모르드 발가르드손이다. 언젠가 귄나르가 명예를 되찾아준 친척 여인의 아들이다. 그러니 귄나르와도 친척지간이다. 그는 귄나르를 시기해 다른 세력과 이간질을 시켜 결국 귄나르를 살해하게 만든다.
모르드의 악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후에도 냘의 양자이자 인품이 훌륭하고 지혜로운 지도자인 호스퀼드 스라인손을 시기해 음모를 꾸민다. 냘의 아들들을 부추겨 호스퀼드를 죽이게 만든 것. 이 사건은 결국 호스퀼드의 삼촌인 플로시가 냘의 일가를 모두 불태워 죽여 버리는 방화사건을 일으키게 하며, 그에 대한 또 다른 복수가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특히 냘 일가에 대한 방화 사건은 이 작품의 핵심이 되는 사건으로, 작품 시작부터 이어져 온 온갖 혈투와 복수에 복수를 거듭한 살인사건들이 얽히고 쌓이다가 비극적인 연출과 함께 터져 나오는 장면이다.
냘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 사고들을 지혜를 통해 해결하고 중재해 왔지만, 결국에는 그 사건들로 인해 자신의 일가가 모두 불에 타 죽는 가장 비극적인 모습으로 퇴장하고 만다. 커다란 힘과 명예를 가졌던 귄나르, 누구보다 전투에 능했던 냘의 아들들, 경건하고 신실한 호스퀼드, 지혜로운 냘까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었더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으며 운명에 대한 인간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든 과정에서 냘을 비롯한 알싱의 의원들은 사건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화해를 유도하려고 노력하나 제대로 해결되는 사건은 거의 없을 정도로 결국엔 피의 복수로 이어진다. 심지어 냘 일가 방화사건에 대한 재판 중에는 그 알싱에서조차 격렬한 갈등 끝에 결국 살인이 일어나고 전투로 이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런 해소되지 않는 갈등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냘의 사가> 작가는 냘 일가 측 인물인 ‘카리’와, 방화사건을 일으킨 ‘플로시’의 행적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한다. 방화사건과 알싱에서의 전투 이후 카리는 플로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랜 시간 해외로 나간 플로시를 쫓는다. 그 과정에서 냘의 방화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인물들에게 복수를 성공하고 플로시만 남는다. 하나 플로시는 그런 카리를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며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오랜 세월 쫓고 쫓기던 둘은 결국 아이슬란드에서 다시 만나 극적으로 화해하기에 이른다. 둘 모두 이 끝나지 않는 복수극에 지쳐있었던 데다 그 긴 모험 동안 겪은 수많은 일들을 통해 복수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끝나지 않는 복수의 굴레와 갈등을 끊어내는 방법은 진정한 화해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냘의 사가>는 정말 방대한 작품이다. 분량도 길지만 문체가 매우 건조하면서 진행도 빨라 한 권짜리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과 등장인물이 하나씩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앞서 언급한 내용들 외에도 아이슬란드에 기독교가 들어와 사람들이 개종하는 과정이나, 주요 등장인물들이 해외에서 벌이는 수많은 모험들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작품을 통틀어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꼽자면, 귄나르와 냘 집안 간의 꼬리를 무는 복수극, 냘의 첫째아들 스카르페딘이 강을 뛰어넘으며 공중에서 도끼를 휘둘러 스라인을 살해하는 장면, 호스퀼드의 아내가 삼촌인 플로시에게 복수심을 충동하고자 호스퀼드가 죽을때 입고 있던 피범벅의 외투를 걸쳐 주는 장면, 냘의 집이 불탈 때 모든 것을 멈추고 끊어내고자 탈출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냘 부부, 방화사건 이후 냘의 아들들을 거짓된 내용으로 모욕하는 것을 들은 카리가 왕궁에 난입해 그 말을 한 자를 살해하는 장면, 그리고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눈감아 주는 플로시의 모습.
특히 호스퀼드의 아내가 복수를 부탁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데, 냘의 사가 작품 전반에 걸쳐 결여되어 있는 인간의 감정이 피 묻은 외투를 걸쳐 주는 행동 하나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이 쉽게 죽어 나가는 시대였다고 하나 가족이 죽는데 어찌 슬프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냘의 사가에서는 그런 인간의 감정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가족이 죽어도 보상금을 얼마나 받는지를 따지고, 복수 역시 감정에서 비롯된다기보다 명예와 의무로 여겨진다. 이렇게 무자비하고 가혹한 세상에서 가끔씩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감정 묘사는 매우 특별하다. 위에 꼽은 인상적인 장면들이 바로 그런 장면들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갈등과 사건들이 벌어졌으며,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리라. <냘의 사가> 역시 그러한 내용이지만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가혹하고 냉정한 자유민들의 사회에서 거친 중세 북유럽인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그 모든 갈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행위들을 더 없이 극단적으로 그리기 때문인 듯하다. 거기에 건조하다 못해 잔인하게까지 여겨지는 문체는 이 비극들을 더욱 강렬하게 한다. 인류의 암흑기라는 중세의 문학에 더없이 어울리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