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지 않은 일만 하게 되는 날이 있다.
내가 정의해 왔던 나에 반대되는 행동들만 하게 되는 날.
인간, 특히 인간 떼. 인간 무리를 싫어하는 내가 굳이 인간 무리에 자발적으로 끼어서 어색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사회생활이 아닌, 독서 모임 같은, 딱히 어떤 이득도 없고 내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말이다. '난 죽어도 그런 건 안 해'라고 생각했던 일. 내가 내 손으로 아무 관계없는 사람에게 연락해서 나 좀 너네 무리에 껴줘. 하고 인간 떼에 자발적으로 합류해 버렸다.
사회적 상황에 자진해서 발을 들이고 아예 뇌를 빼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나. 즐겁게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무슨 숙제 해치우듯이 그러고 있다. 모터가 돌아가듯 의미 없이 지속되는 사는 얘기. 관심도 없는 주제를 주절주절 신나게도 대화하는 사람들. 가끔가다 내게 발언권이 생기면 역시나 사회성 없는 사람답게 더듬더듬 어버버 하기. 그러다가 급발진해서 횡설수설하기. 그렇게 스무스하게 화제가 전환되고 또 어색하게 웃기. 무한 반복.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곧 죽는다던데.
그 말이 맞다. 나는 변화하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곧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기 직전의 나를 내가 해부하고 있다. 엉터리 의사인 내가 죽어가는 나를 수술대에 눕혀놓고, 수술 도구들로 나를 마구 쑤시고 있는 것 같다. 그중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중증이 있었다. 바로 사회부적응 악성세포다. 그 녀석을 꼭 해치우고 싶었다. 근데 그걸 왜 굳이 해치워야 돼? 해부당하고 있던 내가 벌떡 일어나 수술도구를 든 나에게 묻는다. 사회부적응이 너고, 네가 사회부적응인데. 그게 너라는 인간의 본체인데, 그거 떼어내면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사실 나는 알고 있다. 그 세포 어차피 전이될 대로 전이되어서 더 이상 못 떼어낸다는 걸. 할 수 없음과 해낼 수 없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지 오래다.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런 사람으로 나를 정의한 지 오래다. 그런데 나는 최근 들어 내가 정의한 나에 대한 저항감이 강해지는 걸 느꼈다. 사람들과의 자리를 피하면 피할수록 인간이 징그러울 만큼 혐오스러웠고, 내가 정의한 나와 반대라고 인식한 무언가를 견디는 힘이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해버리고 받아들이는 게 마음은 편하고 조금 숨통이 트였지만, 부작용도 같이 찾아왔다. 내가 '나'에 대해 너무 의식적으로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탓인지, 가끔 스스로에 반하는 욕망을 갖고, 내가 생각한 나와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인지부조화가 찾아왔다.
나는 이제야 내가 그런 사람일 수도 있고, 저런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다. 원래의 나는 흰색을 하든지 검은색을 하든지 하지, 회색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보다, 그런 사람 저런 사람이 훨씬 간단하고 명료하니까. 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것을 정해두고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얼마나 인생이 간단해. 하지만 한 사람의 성질과 한 사람의 삶을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하고자 하면, 죽고 사는 것도 아주 간단하게 택할 수 있게 된다는 걸 잘 몰랐다.
나는 최근에 어떻게든 뭐가 됐든 살아보겠노라고 다짐을 한 적이 있다. 왜 그런 결심을 했냐고? 운전하다가 랜덤 노래를 듣는데 우연히 '나 어떻게든 뭐라도 잘해보겠어'라는 가사를 들었다. 그리고 그 가사가 갑자기 삶의 다짐이 되어버렸다. 나의 결심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어이없게, 우연히 찾아온다. 살겠다는 다짐을 한 이상, 간단하게 죽을 수는 없지. 그래서 생각한 게 내가 나를 해부하고 고치는 것이다. 아니, 사실 고장난 뭔가를 고친다는 것보다 이 표현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
나라는 인간의 다양성을 키우기
내가 나를 단단하게 뿌리내리려면 좀 더 다채로워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정의한 나에서 조금씩 벗어나려고 하고 있고, 마치 훈련처럼 수행하고 있다. 인간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발을 들이는 지금,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한 걸음 뗀 것뿐이지만 지금의 나한텐 너무 큰 변화라 생사의 갈림길처럼 느껴질 정도다. 나 너무 구려ㅠㅠ 하면서 우는 날도, 그 인간들에 비하면 나 좀 나쁘지 않은데? 우쭐대는 날도, 지들도 별 거 없으면서 나는 별 거 없으면 안 돼? 하면서 객기 부리는 날도 좀 잦아지고 있는 것만 빼면 아직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아주 조금 즐겁다. 물론 아직도 할 수 있으면 사회와 정말 격리된 나만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마냥 달갑진 않아도, 경직된 몸을 조금씩 풀어나가고 있는 듯하다. 가끔 진심으로 와하하 웃는 날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안 해봤던 뭔가를 하고 나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는데.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