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외출
엄마가 된 나|집에 있는 아기가 보고프다
토요일 아침, 6시.
알람을 듣고 아기가 깰까 얼른 일어나려고 하는데 몸이 너무 무겁다.
미용실에 예약을 해두지 않았다면,
7시에 그림책 소모임이 없었다면,
그냥 계속 잠을 청했을 컨디션이다.
전 날 머리를 감았기 때문에 머리 감는 것은 패스하기로 하고 10분, 10분.. 알람을 늘려가다 30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래도 모처럼 혼자 바람 쐴 기회이지 않던가?
소모임이 끝나자마자 나가야 했기에 대충 화장만 간단히 하고 책상에 앉아 웨일을 켰다.
늘 그랬듯 따뜻하고 울림이 있는 그림책 소모임.
마치자마자 대충 머리를 틀어 올리고 현관을 나선다. 경기도민이 교대까지 가서 머리를 하고 오려니 바쁘다.
(요즘 재테크 소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사실 돈을 아끼려면 난 미용실부터 옮겨야 한다.)
신랑과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기를 보고 싶지만 혹시나 깨우거나, 버스를 놓칠까 싶어 그냥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핏의 청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소모임 하는 동안 책상에 앉았더니 그새 무릎이 나왔다.
'에이.'
모처럼의 외출에 무릎 나옴이 살짝 거슬렸지만 정류장에 섰다.
교대까지 가려면 집에서 광역버스인 3100번 버스를 타고 신사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야 한다. 가장 일반적인 노선이다.
그런데 3002번도 있다.
집 앞에서 동일하게 타는데 한 번에 동서울 터미널(강변역)까지 간다. 내려서 2호선을 타고 교대역으로 가면 되는데 이 편이 훨씬 빠르다.
단, 3002번 버스는 배차시간이 매우 매우 길다는 게 단점이다.
정류장 전광판을 보니 3100번 버스, 5분 뒤 도착이다.
그리고 다시 보니 3002번 버스, 2분 뒤 도착.
'무슨 일이지? 횡재다!'
3002라는 숫자 자체가 전광판에 보이는 날이 드물었기에(딱 한 번 이용해 봄) '운이 좋다'싶어 타기로 결심했는데..
헉, 무슨 일?
기다리는 사이 5분이 지나갔고 3100번이 먼저 보인다.
스마트폰을 켜서 3002번 버스를 보니 지금부터 4분 뒤 도착이란다.
고민이 되었다.
4분 뒤에도 안 올 것만 같았다.
늘 타던 버스가 아니다 보니 확신이 서지 않는다.
3100번이 오자 그냥 타고 갈까 망설였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타는 통에 고민하다 뒤로 물러선다.
사실 예약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나온 거라 3100번 버스를 타고 익숙한 루트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3100번도 광역버스라 서는 정류장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서울로 들어가 노원-공릉-태릉-, 이런 노선으로 가면서 버스를 채우는 점이 3002번과 다를 뿐.
3002번 왠지, 불안하다.
2분이 4분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무슨 마음인지 기다리고 싶다.
정차하는 곳 없이 한 번에 외곽으로 빠져 목적지까지 가고 심지어 타는 사람도 거의 없는 이 버스가 너무
매. 력. 적. 이다!
밖에 나와서도 아무에게도 시선을 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쩌면 매일 같이 한 존재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생활했던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차에 몸을 싣고 (내리는 정류장을 지나칠까 걱정할 필요 없이) 피곤한 몸이 쉴 수 있도록 잠을 청해도 좋을 일이다.
챙겨 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가는 내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무념무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지 못한 숙제처럼 독후감을 써야 하는 책 두 권을 다시 꺼내 한번 훑어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그리고 모처럼 혼자인 이 시간을 가급적, 어디 구석에 콕! 박혀서 보내고 싶다.
오. 래. 도. 록!
그렇게 3100번 버스를 보내고 기다리는데 3002번 버스 안내가 전광판에서 사라졌다.
10분쯤 지났을까?
다시 3100번 버스가 오고 있다.
지금 타기엔 아까 보내버린 3100번 버스가 생각나 못 탈 거 같다.
잠시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있다 3002번 버스가 나를 쌩-하고 지나친 건 아닌가 불안하다.
소식이 없다.
그리고 잠시 뒤 전광판에 3002번 '회차 전 운행'이라 뜬다.
'아, 언제 온단 얘긴가?'
시계를 보니 이제 3100번을 타면 늦을 것 같다.
또 망설이며 고민하는데 3002번이 보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다!
(버스 타고 가는 일이 이렇게 고민하고, 마음이 왔다 갔다 할 일이던가?)
탑승해 잠시 뒤 차창 밖을 보니 차가 쌩쌩 지나간다. 차 안에는 기사님 포함 나까지 4명뿐이다.
한~적하다.
어제보다 선선한 것이 날씨도 좋다.
얼마 만에 혼자 외출인가? 거의 할 달만이다.
머리를 하기 위한 외출이었지만, 간만인터라 주위에 많은 사람들과 뒤엉켜도 좋으련만, 사람들이 없는 곳이 그저 편하고 좋다.
그냥 잠시 외출이었어도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지 않고 혼자 카페에 가거나 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했을 것 같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 그리웠다.
터미널에 도착해 2호선을 타고 가며 언뜻언뜻 보이는 한강과 건물들 사이 햇살이 좋다.
빠른 하차 방법에 따라 전철 칸을 옮겨 걷는데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마냥 소소히 즐겁다.
집에 두고 온 아기가 일어났을 테고, 매일 육아의 고단함으로 화가 나 있는 아내의 외출을 감내할 신랑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거다.
미안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살짝 상쾌하기도(?) 하다.
우리 매미는 평소 (정말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에너지가 100인 아기인데 아빠에게 200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살짝 있다.
아무리 오늘 하루 육아로 신랑이 고생한다 해도
평소 나의 마음속 복잡한 감정과 고단함이 어떤지 절대 모를 거 같아서이다.
그래서 아기가 엄마 대신 '매운맛을 호되게 아빠에게 보여주었으면' 하고 잠깐 생각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야말로 유쾌, 통쾌, 상쾌다!
(나는... 악처일 수 있다!)
미용실에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아이스 라테 한 잔을 받았다.
시원한 커피 한 잔이 들어가니 더욱 좋다.
오랜만에 긴 머리를 짧게 자를 예정이다.
큰 변화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기분전환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 사소함으로 육아로 지쳤던 내 마음을 조금 달래주고 다시 힘을 내보고 싶다.
지친다는 이유로 아기에게 미안함이 많은 한 주였다.
안내받은 자리로 와 잠깐 아기와 영상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혼자 외출이라 엄청 홀가분해지고 싶었는데 집에 있는 매미가 나를 보고 웃는 순간, 괜히 애틋하고, 미안하다.
휴대폰 안으로 들어가 꼬옥 안아주고 싶다.
나를 보기만 해도 미소가 얼굴 전체에 번지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럽고 따뜻하다.
자유를 갈망하며 얻은 간만의 기회인데, 머리를 하고 바삐 돌아갈 생각을 하는 거 보니, 나도 이제 진짜, 영락없는 '엄마'다.
하루 종일 아기 옆에서 사부작 거리는 움직임을 살피고 집안일을 하면서 보내는 긴 시간이 무료하고 고단했는데,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나를 보니 피식-웃음이 난다.
그렇게, 또 조금 '엄마가 되어 가는 그 길'에 섰다.
나온 김에 혼밥을 하든, 카페든 가볼까 했는데..
횡단보도에서 몇 번은 방향을 고민하게 되겠지만, 결국에는 직으로 발걸음을 돌리겠지?
사랑하는 매미야,
엄마 조금만 더 혼자인 채로 있다 얼른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