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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다'라는 현상

by justit Feb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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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또는 그 단계를 낮추더라도 어색한 사태는  행동을 주춤거리게 만든다. 그 정도에 그치면 그래도 좀 나은 편이고, 상대에 대해 야릇한 의심마저 하게 만든다.
'이상한 일이다. 모르는 번호로 내게 전화가 걸려 올 일은 없는 데!'
그래서 바깥 주차장을 내다보게 된다.
'누군가 내 차를 긁어서 그 일 때문에 연락을 취한 것일까?'
'아니면 불순한 의도로 접촉을 시도하는 것일까?'
생존본능을 기준으로 하면 타자는 내게 부정적 존재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타자는 지워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이런 원시적인 본능에 의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나를 이용하려는 불의가 꽤나 많다. 요즘 같은 세상은 더 그렇다. 어차피 나에 관한 사항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죄다 다 까발려 있는 세태이며, 무슨 의도인지도 모를 전화만 수도 없이 걸려온다. 혹여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낯선 번호임에도 손이 닿는다. 그러고 나면 전혀 관심사가 아닌 일이며, 더욱 괜히 확인한 게 아니냐는 후회와 불안이 밀려온다. 그래서 등록되지 않은 연락처는 애써 외면하게 된다. 이러니 세상 모든 일은 낱낱이 연결되었으면서도 차단되어 있다. 세상 모든 일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이 디지털 세계에서는 그게 큰 부작용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긴장이 더 커지면 아는 연락처마저도 일단 진정한 것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것은 서로에게 오히려 반목을 조장한다.
연락을 무시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선별적 접속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렇지 않았다는 해명을 늘어놓게 한다. 굳이 상대를 설득, 이해하게 할 필요까지야  없더라도 타자에 대한 부정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친구 하나는 최근, 오지랖 넓게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댓글을 달고는 그곳으로부터 갖은 문자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기존 전화번호마저 바꿀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시험 통화처럼 내게 연락을 취해 왔는 데, 이걸 내가 받지 않은 것이다.
그럼 예전 번호를 바꿨다고 문자 등으로 예고하고 전화를 해 왔으면 되었을 텐 데...
하기야 그런 경우에도 그 진정성은 의혹에 휩쓸리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말처럼 누군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극한 회의까지 동원하지는 않았을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조차 의심하는 세상이니 막연한 불안은 그 깊이를 더한다.

우리 사는 세상은 타자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마주 한 상대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고는 자신을 확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 유아론적으로 오직 나만을 기준으로 한 세계는 있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은혜를 베풀듯 상대를 수용하든 어떻든, 세상사는 상호관계가 선결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타인이 내게 독소를 내뿜더라도, 아무리 상대가 의심스럽더라도 내 편인지를 선별하는 행위에서마저도 이미 타인이 전제되어 있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이해타산적으로 따지더라도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그 연결은 보다 파편화된다. 이 접속의 사회에서는 그런 소외와 격리가 원인인지 아니면 결과인지가 헷갈리게 된다. 즉 서로가 격하게 분리되어서 정보화 기술 덕택에 연결되는 것인지, 아니면 디지털 세계 탓에 상호 분열적인지 구별이 모호한 것이다.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지점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말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아마도 그것이 오히려 정상적 상황인지도 모른다. 위험이 상존하며 이전에 묻혔거나 무시되던 사실이 이제야 나타나니 마치 역설적이고 비정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두 발로 똑바로 걷기보다는, 두 팔을 땅에 딛고 걸어야 제대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익숙하거나 별 의심 없을 현상이어야 할 것이 이 '낯설다는 것으로 다가오는 일이 우리를 더 두 다리로 걷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의혹을 피해 사람들이 가상의 세계로 빠져들면 그럴수록 더 비정상성을 조장하는 길로 이끈다. 그래서 제정신을 차려야 하는 자신을 오히려 독단으로 몰아가는 경향도 뚜렷하게 만든다. 그래도 낯섦은 타자를 향한 것보다는 자신으로 이행되어야 함이 좀 더 반성적이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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