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나의 경조증
우울한 시기가 있다면 그렇지 않은 시기 또한 있다. 평범한 사람이 들으면 웬 당연한 소릴 하냐 싶겠지만 양극성장애환자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양극성장애는 조증과 우울이 번갈아 나타나는 질병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단순히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비정상적인 기분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양극성장애 환자들은 그 기분의 변화를 경계해야 한다. 양극성장애 2형인 나는 1형보다 약한 ‘경조증’이 나타난다. 경조증(輕躁症)은 말 그대로 輕, 가볍다는 뜻이다. 1형 환자들에 나타는 조증에 비해 가볍다는 뜻이지 결코 심각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경조증은 나에게 빛나는 별이나 태양 같다.
경조증 시기에 나는 굉장히 밝고, 쾌활해진다. 매력이 넘치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도 생긴다. 우울시기와 다르게 적절한 농담과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고, 업무의 효율도 올라간다. 뇌가 팽팽 돌아가 평소의 배의 속도로 업무를 끝내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도맡아 일을 처리한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밝고 명랑한 사람’으로 인식한다. 실제로 내가 경조증 시기 일 때 만난 한 동료는 나를 ‘밝고 쾌활한 빛나는 태양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렇게만 들으면 ‘경조증 좋은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손목을 걸고, 결단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경조증이 나타나는 시기에 나는 과도한 지출을 하기 시작한다. 필요 없는 것을 사서 모으는 빈도가 증가해 생활비가 쪼들리기 시작하고,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과도하게 예민해지는 날이 늘어 짜증스러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고조된 기분에 술값을 턱턱 내기도 하며, 무분별한 만남을 즐기기도 한다. 또 경조증이 심해지면 환청이나 망상 같은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할 수 있다.
내가 첫 조증 삽화를 겪은 건 이십 대 초반이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그건 조증삽화였을 거야’ 라고확신이 드는 첫 순간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5년이라는 시간을 만난 연인과 관계를 끝내고 우울해하고 있었다. (편의상 A라고 하겠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동성애자다. A와의 관계는 결코 건강한 관계가 아니었다. 5년 동안 A는 수도 없이 바람을 피우며, 나를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와중에 은근히 ‘너는 나 없인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나 말곤 아무도 만나지 못해’라는 메시지를 은근히 던지며 나를 조종하려 들기까지 한 A는 마지막 까지도 바람을 피우며 나를 떠나갔다.
주변 친구들의 만류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A를 또 붙잡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지만, 바닥을 친 내 자존감은 회복되지 않았다. A가 나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난 것은 전적으로 내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매력적이지 않아서’, ‘내가 멍청하게 굴어서’, '역시 동성애자라서 연애가 쉽지 않아' 같은 억지 이유들을 붙여가며 이별 아닌 이별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살만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A에게서 벗어난 탓일까? 아니다. 우울이 극심해져 그에 반발하듯 조증삽화가 시작된 거였다. 당시의 나는 자신이 양극성장애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드디어 A에게서 벗어나 나에게도 봄이 왔구나'라고 생각하며 끓어오르는 에너지와 쾌활함을 만끽했다.
당시 나는 며칠 잠을 안 자도 에너지가 넘쳤다. 과제 기한을 한참 남겨 마무리하고 퇴고까지 할 정도로 업무효율이 올랐고,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바쁜 와중에도 다른 동기들의 과제를 도와줄 만큼 에너지가 차고 넘쳤다. 순식간에 이런저런 취미를 시작하기도 했다, 대부분 골프, PT, 수영강습 같은 돈이 많이 들고 활동적인 취미들이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의 대부분을 취미생활에 썼다. 그러는 와중에 한 달에 몇십만 원씩 옷을 사고 나를 꾸미는데 돈을 썼고, 돈이 부족해져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이나 해야 했다. 또 하나 당시 나는 나이치고 신용도가 꽤 높았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장기렌트를 덜컥 구매해 5년짜리 할부로 차를 하나 장만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전공이 나의 적성과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어린 시절의 꿈을 찾아 그림을 그리겠다고 덜컥 휴학계를 내기도 했다. (휴학이 부모님과의 적절한 타협안이었다. 나는 원래 자퇴를 하려고 했었다.)
이 모든 게 A와 헤어진 지 불과 몇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일들을 덥석덥석 벌려놓고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해도 값비싼 취미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할부로 끊어 놓은 장기렌트가 매달 몇십만 원의 지출을 불러오니 렌트비를 내고 나면 내가 생활할 돈이 없어져 취미를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휴학을 했으니 뭐라도 배워야 할 것 같아서 미술학원에 등록했고, 미술학원비와 렌트비를 감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뛰어야 했다. 평일 아침, 저녁 두 개, 주말알바 하나. 이런 식이었다.
'좆됐다'라는 글자가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칠 줄을 몰랐다. 1년짜리 휴학기간 동안 뭐라도 이루어내야 할 것 같아서 미친 듯이 밤새도록 그림을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도중에도 그림을 그렸다. 이왕 장기렌트로 차를 뽑은 거 뽕은 뽑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시간이 생길 때마다 차를 끌고 드라이브를 나갔고,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하는 덕분에 돈에 여유가 생긴 나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술값이나 커피값을 모조리 내가 내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무분별한 만남'에 있었다.
경조증 시기에는 충동성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며 무분별한 소비, 위험한 행동(과속, 폭력성 등), 감당 못할 일 벌이기 등이 나타나지만 두드러지게 성욕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만큼 나를 꾸미고 섹스어필을 한다. 경조증 시기의 양극성장애 환자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유쾌한 분위기 메이커이자, 넘쳐흐르는 활기로 주변을 휘어잡고, 그 덕에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선사하는 매력적인 인물이 된다. 거기에 더해 평소보다 좀 더 자신을 꾸미고 과감히 매력을 어필하는 것이다.
A와의 헤어짐 이후 나는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가 다니는 모든 공간에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친하게 지내는 것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선을 넘는 경우가 너무 자주,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동성애자다. 나는 내가 살면서 남자와 관계를 가질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헤테로들이 동성에게 성애의 감정을 가지지 않듯, 나는이성에게 성애의 감정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증의 상태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만남을 이어갔다. 주말 저녁이면 술집에서 낯선 이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게 익숙해졌다.
위험한 상황도 더러 있었다. 나는 하룻밤 상대였다고 생각한 사람이, 관계 이후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애인인양 굴며 집착하는 일도 있었고,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만난 상대라면 내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거나 상대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는 일도 빈번했고, 나는 어느새 '관계에 무책임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당시 나는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행동을 합리화했었다. 청춘들이 눈 마주치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라고 하며 무책임한 내 행동에 이유 아닌 이유를 붙이며 말이다.
성욕을 충족하는 것 외에, 좀 더 본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충족되지 못한 결핍을 채우려는 행위'이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당시의 나는 엄청난 결핍 덩어리였다. 그래서 잠시나마, 사랑받고 싶고, 결핍을 채우고 싶어서 그 도구로 섹스를 택한 것이다.
정서적 교감으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극적이고 빠른 수단을 택한 것이다. 정서적 교감 따위 개나 줘 버리고, 육체적 접촉을 통한 관계로 나의 허기를 달랬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만큼 정서적으로 가까워졌다고 '착각'했다.
그게 나를 지옥으로 이끄는 줄도 모르고 찬란한 봄이라고 착각하며 말이다.
A와의 길고 악몽 같은 연애가 끝나고 무분별한 만남들에 지쳐 갈 때 쯤, 나는 섹스가 아니라 연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위험천만한 짓을 그만두어야 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에 끊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멍청하게도 또는 게으르게도, 나는 하룻밤 상대들 사이에서 연애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그 시도가 잘 되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상대가 있을리 만무했고, 무엇보다 나는 여성과 연애를 하고 싶은데 하룻밤 잤다고 해도 여성들은 나와 연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 그럼 그렇지'를 외치며 쌓여가는 욕구불만과 스트레스를 해소 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술과 담배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나는 주로 경조증 시기에 사랑이 싹튼다. 그랬었다. 남들이 보면 '금사빠'처럼 보일 정도로 맹렬히 그 상대방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듯 행동한다. 정신건강을 다룬 책들에서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어디서나 명시하고 있다. 하물며 유튜브를 통해 정신건강에 대해 조금만 검색해 보아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동영상을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연애는 일종의 내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 그 역할을 해왔다.
끊임없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주는 목소리,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 잠이 안오는 밤마다 옆을 지켜주며 달래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 나는 큰 위안을 얻었다. 실제로도, 불면증이 심했던 나는 연인이 생기면 조금이나마 잠을 잘 수 있게 되어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불타는 초반을 지나 3개월쯤 지나면 대부분의 연애는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나는 그 안정기를 상대가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전보다 덜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생각했었고,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기 때문에 더이상 내 옆을 지켜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시 불면증이 시작되고, 상대방에게는 집착으로 느껴질만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고, 연인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모든 연애가 끝남과 동시에 나에게 긴 우울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