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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Miami Jun 11. 2024


트라우마를 딛고 성장하기

트라우마는 제때에 치료되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작든지 크든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때때로, 아주 큰 상처는 우리 마음에 오래 머물러 삶의 질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나도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고, 오랫동안 마음이 힘들었다. 중학교 때 받은 큰 상처는 회복되지 않고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악화되어 갔다. 사회적으로 또는 학교 안에서 트라우마를 돌볼 시스템이 되어 있지 않았을 때였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환경의 변화를 맞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무엇보다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었다. 상처를  꺼내 직면하고 이야기한 것은 마음에 정화작용을 해 주었다. 아픈 데를 더 일찍 보살폈다면, 마음속 응어리는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1974년 9월, 용산여자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에게 잊지 못할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가을 반 대항 합창대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높은 하늘과  따뜻한 햇빛은 우리를 교실 밖으로 부르는 듯했다. 그날 마지막 수업으로, 가정 시간이었고 우리의 마음은 벌써 집을 향하고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노래 연습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나는 무심결에 따라 흥얼거렸다. 그 여교사는 눈총으로 아니면 공부에 집중하라는 말로 가볍게 넘어가지 못했다.  대신 화를 내며 벌로 나를 교실 앞에 세웠다.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수업 후, 나는 불려 와서 담임선생 앞에 섰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수학을 가르쳤던 담임은 주먹으로 내 머리를 쳤다. 쓰러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너무 충격을 받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너무 아팠고 왜 맞아야 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울면서 일어났다. 그 가정 선생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의 야비함과 배신에 기가 막혔다. 나는 한 실수로 두 번 벌을 받은 셈이었다. 교무실 안에서 어떤 선생도 상관하지 않았다. 급우들은 이미 학교를 떠났다. 누구도 내가 선생에게 맞았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어도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학교에서, 체벌이 보통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폭력을 일삼던  담임선생이 나한테도 체벌을 가하면서 그의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는 13살 소녀의 순진함을 무력으로 조치했다. 


이 정신적, 육체적 폭력은 나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날로, 걱정 없고 발랄했던 나의 어린 시절은 끝났다. 과도한 처벌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분노했다.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수치심과 치욕을 느끼고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었다. 부모님은 시골에 계셨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울었다.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왼쪽 머리 부분이 부어올랐고  통증을 느꼈다. 며칠간, 머리와 자존심에 멍이 들어 학교에 가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다시 학교에 왔을 때는, 억울함에 대해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었다. 내 결석은 누구의 관심사도 안됐다. 수학 성적은 떨어졌고 반항심이 높아져 갔다. 그 선생을 똑바로 보지 못했고 수업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떤 선생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빨리 중학교를 끝내고 싶었다. 이 경험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더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2학년을 끝내고 그 가해자를 보지 않게 되었을 때 조금씩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상황은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학교 시스템은 중학교 때와 똑 같이 학생들의 정서적 성장과 발달에는 관심이 없었다. 여전히,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매를 들었다. 더 이상 주먹질을 받지 않기 위해 나는 긴장하면서 살았다. 그 나빴던 날이 생각날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회피했다. 그때 상황을 합리화하려고 애썼다. 그 선생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화풀이할 상대로 나를 택했다. 재수 없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제나 그의 주먹은 문제 해결의 열쇠였다. 왜 그렇게 형편없고 졸렬한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식으로 나의 불평을 적은 메모를 마음속  항아리에 넣고 뚜껑을 봉해 버렸다. 그런 노력은 아무것도 풀지 못했고 마음은 계속 무거웠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그 선생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잊어갈 수 있었다. 억압된 교실을 벗어나 자유를 느꼈다. 내 마음대로 듣고 싶은 강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등뒤에서 나를 주시하는 사람 없이 내 의지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클럽활동을 통해 친구를 사귀었다. 엠티를 가서 우정을 돈독히 했다. 밤에는, 친구들과 상처받은 경험을 주고받으면서 숨겨두었던 분통을 꺼내어 날려 보냈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이해했고 아픔을 나누어 가지며 깊은 트라우마를 치유했다. 이야기를 많이 하면 할수록 흉터는 희미해져 갔다. 


13살 때 겪은 트라우마는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5년 정도 나를 힘들게 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그 아픔을 직면하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들 그랬고, 그러려니 하면서 그 환경에 묻혀 살았다. 믿을 만한 어른이나 친구가 없다고 생각해 아무에게도 그 사건을 털어놓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 친구들을 사귀고 내 마음의 빗장을 풀 수 있었다. 그 아팠던 시간을 돌아보고 있는 그대로, 느낀 대로 얘기할 수 있었다. 내가 느낀 화남, 우울감, 긴장, 복수심등 모든 감정을 털어놓았다. 친구의 이해와 인정을 받았다. 내 마음은 새털같이 가벼워졌고 학교 생활은 즐거워졌다. 그 트라우마는 더 이상 나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상처를 개방하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마음고생은 길어질 수도 있었다. 친구와 대화로 우울했던 과거를 되짚어 보고, 서로의 감정상태를 공감했던 것은 늦게나마 아주 훌륭한 트라우마 치료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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