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펼치는데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수였다. 호텔리어가 되어 주체적인 삶을 살길 원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유학을 했다. 그러나,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마이애미에 도착했을 때부터 도움을 받았다. 둥지를 막 벗어난 아기새같이 이국땅에 온 나는 많은 도움이 절실했다. 선배 학생의 안내로 학교와 도시를 알아 갔다. 룸메이트와의 매일매일 대화로 영어가 늘었다. 친구들과 공부를 하며 대학원 생활을 즐겼다. 학교를 통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것은 인턴십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여러 동료들의 청원서가 나에게 일 자리를 부여했다. 호텔리어가 되어 독립했다. 그 과정에서, 문제에 부딪히면 혼자 끙끙 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마다 내 주위에는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1991년 5월에, 플로리다 인터내셔널 유니버시티(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대학원에서 호스피탈리티 매니지먼트(Hospitality Management)를 전공하며 2학기를 끝냈다. 무더위가 꺾인 8월 말쯤, 레스토랑 매니지먼트 수업에 조셉이 게스트 스피커로 왔다. 그는 파운틴블루 힐튼호텔(Fountainebleau Hilton Hotel)에서 음식과 음료를 총괄하는 디렉터였다. 이 힐튼은 1500개의 객실과 15개 회의실을 갖추어 플로리다에서 제일 큰 호텔이었다. 그는 자기 두 아이를 돌볼 보모를 구하고 있었다. 기회 포착을 위해 다음날 그의 가족을 만났다. 전형적인 미국 가족이었다. 조셉과 광고회사에서 근무 중인 비비, 3학년인 딸 린지, 1학년인 아들 벤지였다. 호감을 받았고 그들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주 5일 오후 내내 두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알바는 무임금이었다. 금전적인 보수를 대신할 의미를 찾아야 했다. 주식 이외에 영어향상, 미국 가정생활 체험, 조셉으로부터 호텔 업무에 대해 배울 수 있음과 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혜택이 있었다.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차고를 개조해 만든 방으로 이사했다. 그로부터 일 년간, 오전에는 내 수업을 들었고, 오후에는 아이들을 돌보았다. 숙제를 봐주고 한국 게임과 노래를 하며 친해졌다. 우리는 묵찌빠와 아리랑을 좋아했다. 저녁에는 도서관에서 책에 파 묻혔다. 조셉이 당직을 선 주말로는 스위트 룸에 묶으며, 호텔을 샅샅이 구경했고 미래의 일하는 나를 그려보았다. 공부와 일로 꽉 찬 하루하루는 좋은 미래를 향해 갔다. 제일 좋은 보모라는 평가와 신뢰를 얻었다. 조셉의 가족은 나의 근면함과 성실을 높이 샀다. 그들 모두가 나의 친구가 되었다. 1년을 채운 마지막 날, 우리는 서로 서운했지만 고마움을 안고 헤어졌다. 1992년 12월, 자랑스럽게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졸업 후 항해 노선을 점검했다. 대다수의 한국 졸업생들이 인턴십이나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튼튼한 줄이나 뛰어난 능력이 없는 외국인에게 잡(job)은 멀고 먼 길이었다. 조셉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기꺼이 힐튼호텔에 인턴십을 주선했다. 고맙게도, 정성을 다했던 알바가 인턴십 추천으로 이어진 줄이 되었다. 그러나, 알바때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무보수 인턴십이었다. 귀국인가, 노페이(no pay)로 일할 것인가를 다시 저울질해야 했다. 돈 대신 얻을 것이 무엇인가를 나열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함, 주말로 다른 알바를 할 수 있음, 보모자리가 인턴으로 이어진 것 같이, 인턴을 잘하면 취직 가능성이 있음 등이었다. 최소한, 석사학위를 뒷받침할 경험을 쌓을 수 있다고 보았다. 힐튼을 선택했다. 파운틴블루 힐튼호텔 프론데스크에서 12개월 인턴십을 시작했다. 바다를 맞대고 12개 수영장과 11개 레스토랑이 있는 이곳은 마이애미에서 제일 분주하고 활기찬 호텔이었다. 이곳은 마이애미 삶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유니폼을 입고 세계각지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절차를 트레이닝받으며 학교 밖의 실전 기술을 배웠다. 자진해서 동료의 일을 도와주며 더 많이 익혔다. 달이 지나며 업무에 능숙해졌다. 여러 인종으로 섞인 모든 직원과 익숙한 관계가 되었다. 일 밖에서의 모임도 가지며 친한 친구도 사귀었다. 자율적으로 일처리를 하며 보람도 커져갔다. 무엇보다, 정식 직원으로 일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고 느꼈다. 취직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인턴십이 끝날 무렵에 고용 의사를 타진했다. 프런트오피스 디렉터, 조지는 단번에 ‘노’라고 답했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석사 학위와 인턴십은 쓸모없단 말인가, 기대가 컸나 보다. 최후의 노력으로, 나는 친한 동료들에게 취직이 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간다라고 소문을 냈다. 그러자, 그들은 절친한 친구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 상처받은 나를 안아 주었고 내 불만에 동의했다. 더 나아가,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인숙은 모든 일에 능률적이다. 인숙은 훌륭한 팀 멤버이다. 우리는 그녀가 고용되어 계속 일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청원서를 썼다. 33명이 서명을 하고 조지에게 전달했다. 그 편지는 떨어지는 나를 구제한 보호망이었다. 상사, 조지는 나에게 “입사를 축하합니다!(You are hired!)”라고 흔쾌히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악수를 했다. 미국에 와서 생긴 최고의 날이었다. 마침내, 호텔리어가 됐다!!! 그것도, 다수의 사랑을 받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많은 동료들은 한국인으로서 몸에 밴 정성, 친절, 민첩함을 지켜보면서, 나에 대한 신뢰를 쌓아왔던 것이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는 속담과 같이 그들은 내편에 서주었다. 나를 밀어준 그들은 찐한 친구들이었다. 나는 강한 소속감과 자신감을 느꼈다. 미국사람들도 의리를 소중히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무보수로 일 했던 보모시절과 인턴 기간이 크게 보상을 받았다.
희망을 향해 외로운 기러기로 태평양을 날아왔다. 머리는 꿈을 이루기 위한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몸과 마음은 고독으로 시들었다. 초기 유학 생활은 불안했다. 초조함과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친절하게 대했다. 내가 필요로 했던 에너지와 기회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았다. 그들은 기다렸던 것같이 스스럼없이 나에게 길을 보여주었다. 보모, 알바로 목적지로 향한 도로에 접어들었다. 커넥션(가까운 인간관계) 유지는 연료가 되어 내 차를 지탱했다. 도중에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친구를 사귀면서 여행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목적지에 가까워졌을 때, 떨어진 큰 나무가 도로를 막았다. 돌아서 가기 전에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곧바로 달려와 그 장애물을 제거하며 길을 열어 주었다. 그때그때 도와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었다. 나라에 상관없이, 인종에 관계없이 내 주위에는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