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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배고파서

잠깐 쉬어가는 모퉁이 글.

by 유진 jjinravel

<혼자 떠난 어느 날의 일기 1>

_ 오늘은 일기체로 써 내려갑니다.



배고팠다.


밥도 챙겨 먹을 시간 없이 일했고, 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잠에 들었으며, 눈 속에 그득했던 무언가를 향한 갈증은 사라져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타서 멍하니 바깥을 응시하다가, 저 멀리 텅 빈 눈을 가진 한 사람이 보였다. '배가 고픈가, 어디가 아픈가, 삶이 많이 애달픈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그게 나였다. 어두컴컴한 유리창에 되비치는 것도 모르는 채.


지금 내 상태가 그랬다. 물배가 찬 느낌. 무언가를 입에 넣었으나 허기졌으며, 내 에너지를 채우기엔 역부족했다. 그래서 떠나왔다. 내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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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배를 채우고 싶었던 걸까. 밥을 제때 먹지 못해 허기졌던 것일까. 혼자 떠나온 여행에서 깨달았다. 마음의 허기짐도 나를 배고프게 만든다는 것. 저 멀리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넓은 세상을 느낄 때, 내 취향의 공간들을 자꾸만 나에게 보여줄 때, 그리고 그 공간에서 기록하며 수없이 나를 마주할 때. 나는 더 이상 배고프지 않았다. 어쩌면 배가 아니라 시간과 말 한마디가 고팠던 게 아닐까. 내가 나에게 쓰는 시간과 나에게 건네는 한마디 말. 그동안 살기 위해서 가까운 누군가에게 나의 고됨을 털어놓으려 했지만, 평정심에 대한 강박이 있던 나에겐 그 또한 포장이었음을. 온전한 나의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나는 나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나보다 알지 못한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다면, 허기를 채우고 싶다면,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된다. 나와 함께 내가 솔직해질 수 있는 곳에 가면 된다. 방 안의 책상이든, 자주 가는 카페든 모두 좋다. 나는 바다와 숲, 즉 자연 앞에서 제일 솔직해진다. 그래서 자꾸만 혼자 떠나는 걸까. 그곳에 갈 땐, 종이와 펜을 잊지 않으려 한다.



<혼자 떠난 어느 날의 일기 2>

제목 없는 디자인 (59).png <노래 가사> 김광석 -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혼자 지내는 시간들을 차곡차곡 쌓고, 또 기록하다 보니 채우고 비워내는 방법도 배워가는 중이다. 배고파서 채워낸 나의 허기진 마음을 가끔은 비우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 너무 많은 생각들이 나를 물들일 때면, 이따금씩 넘치게 배부를 때가 있다. 그 배부름은 식곤증 마냥 나를 졸리게도 만들고, 마음을 무겁게도 만들고, 때론 '아 더 먹지 말걸.' 하는 후회도 가져다준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적당히 단순해지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하루에 한 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 것.' 이건 여행에서도 일상에서도 적용되는 나의 작은 규칙이다. 아래 질문들이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일기장에 써둔 질문들)

1. 내가 처음에 했던 생각은 뭐였지?
2.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할 일이 맞을까?
3. 내가 나의 보호자였다면 어떤 조언을 해줄까?
4. 이 생각을 하는 지금 나의 마음 상태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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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과 '나'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누는 사람이다. 혼자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방법, 혼자 여행할 때 하는 생각들 등을 나누는 사람. 그런 나도 가끔은 혼자가 무서울 때가 있다. 혼자가 외로울 때가 있다. 처음엔 그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혼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면서, 이 분야에 왜 늘 완벽하지 못할까.


이 생각들이 내 마음을 뒤덮을 때 즈음, 심리 상담일을 하는 분이 이런 말을 건넸다. "유진님, 저도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 이혼하고 마음이 힘든 분들을 주로 상담하는데 집 가면 남편이랑 자주 싸워요!" 이 말을 듣고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아, 나도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지.'


그 뒤론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혼자서 부단히 흔들려 봤기에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혼자만의 여정과 고민들을 쌓아 왔기에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라고. 실은 단순했다. 내가 흔들려 봤기에 공감할 수 있고,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다 나의 좋은 재료이자 거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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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배고플 땐, 근근이 혼자가 되어본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고, 충분히 채워주고 다시 비워내 준다. 그러면 좁아터져 보였던 세상이 조금은 살만해 보인다. '헤맨 만큼이 내 땅'이란 말처럼, 부단히 이곳저곳을 혼자 방황하는 중이다. 두서없어 보여도 멀리서 보면 기승전결의 '승과 전' 사이쯤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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