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히, 분위기가 고요하고 편안하게
잔잔히 웅장한 곳이 있어요. 마음속이 아릿한가 싶으면서도 이내 가뿐해지는 곳.
제겐 이 여행지가 바로 그런 '곳'이었어요. 혼자 떠났지만 여럿이 되어 돌아왔죠. 처음 보는 사람들과 보내는 일주일 남짓의 시간이라니, 조금은 낯설고 확신이 없었지만 그래서 더 맞서고 싶었어요. 이때의 저는 이런 새로움과 낯섦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떠나오길 잘했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저답지 않은 방식으로 몽골로 떠나왔어요. 원래의 저라면 '이때쯤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가벼운 계획이라도 세워두곤 하는데, 적잖이 충동적으로 떠나온 곳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요.
카페에서 친구와 각자 일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흰 바탕의 검은 글씨들만 줄곧 보다가, 타자기 위에서 쉼 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문득 제 세상이 참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갑했어요.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SNS를 열었고, 그곳에서 한 풍경을 마주했습니다. 드넓은 초원에 자유로이 배회하는 동물들, 그 초원을 달리는 사람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의 광활함에 제 마음은 속절없이 동요하기 시작했나 봅니다. 한참 그 풍경을 들여다보다가, 대뜸 친구에게 외쳤습니다.
"나 저기 갈래!!!"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가라~"고 대답했고, 쓸데없이 강한 책임감이 발동해버린 저는 제 말에 책임을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가자마자, <러브몽골>이라는 인터넷 카페에서 몽골 동행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우연히 한 팀을 만나게 되었죠. 말을 내뱉은 당일에 동행을 구하고, 다음 날 비행기 티켓을 사고, 두어 달 뒤에 몽골로 떠났습니다. 친구는 그저 놀라서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죠. 저도 저에게 놀랐습니다.
생각한 그대로였어요. 자지러지게 좋았습니다. 드넓은 초원 속에 뛰노는 동물들, 그리고 저. 이게 꿈인가 싶었어요. 같이 온 사람들도 하나같이 좋았고, 처음의 어색했던 마음들은 몽골의 자연들이 서서히 녹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에게 참 잘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어요.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자연이 저희에게 주는 것들은 단연 풍경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모든 여행이 그렇다시피 좋은 것만 있지는 않았어요. 조금 불편하기도 했죠. 익숙하지 않은 게르에서 자는 것, 오랜 시간 차를 타고 굴곡진 길을 달리는 것, 향신료 냄새가 진했던 음식, 이따금씩 씻기 어려웠던 환경 등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의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제 스스로에게 놀랐던 건, 생각보다 저는 이런 환경에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조금 못 씻고, 못 먹고, 못 자도 눈앞의 풍경 앞에선 그저 가벼운 투정으로 여겨지고 말았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잘 먹고 잘 잤습니다. 마음이 평화로우니 몸이 좀 힘든 건 괜찮았던 건지, 그래서 몸과 마음 이 둘이 타협을 했던 건지 싶기도 하네요.
이런 마음으로 여행을 했어요.
내가 언제 이런 게르에서 잠을 청해 보겠어!
길게 이동하는 차 안에서 사람들과
스피커로 노래를 듣고 부르니 이게 청춘이지!
몽골 사람들은 이런 음식을 먹는구나!
낯선 환경에 놓이니까 진짜 몽골 여행 온 것 같다..!
어디에 놓여 있든, 주어진 환경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건 제 마음가짐뿐이니까요. 생각보다 저는 '마음가짐'에 따라 쉽게 동요를 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이걸 좋게 이용해 보는 것이죠.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네"라고 답해 보는 경험은 귀하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어요.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 답변이 쉽사리 나오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나 진짜 행복한가'하는 마음과 '내가 지금 행복해도 되는 걸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다가 얼버무리고야 말죠.
이 몽골이란 여행지에선 행복의 총량 따위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저 달리고 싶으면 달리고,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행복하고 싶을 땐 힘껏 행복할 뿐이었죠.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습관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그 좋은 풍경을 보고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나중엔 그저 웃음부터 머금기 시작했어요. 그 습관은 일상에 와서도 좋은 거름이 되어 주었네요. 긍정적인 좋은 감정을 느끼고 싶다면,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는, 와하하 웃어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세요. 그러고는 그곳에서 좋은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고 기억하는 습관을 만들어 주세요. 좋은 감정을 떠올리는 것, 그 감정을 놓치지 않고 충분히 만끽해 주는 것도 습관이 될 수 있기에.
살면서 이렇게나 많은 별을 본 건 처음이었어요. 별이 쏟아진다는 표현은 그저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그동안 보고 있던 하늘은 너무나도 비좁았네요. 정말로 별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다들 자러 가고, 별이 더 보고 싶어서 잠깐 나왔던 적이 있는데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별들과 저만 있자니, 우주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습니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그 무서움이 무색할 만큼 입을 쩍 벌리고 한동안 바라보았어요. 이 별들 앞에서 제가 고를 수 있는 말은 몇 개나 될까요. 그 말이 이 풍경에 가닿기나 할까요. 네, 맞습니다. 말로 표현하기에 어렵다는 말을 돌려한 것이죠.
상황이 되신다면, 직접 보고 오셨으면 해요.
아, 저처럼 상황 따지지 않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무작정 떠나오니 와닿는 것들도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어딘가에서 이런 글을 읽었던 적이 있어요.
몽골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현지인들은 초원을 달리다가, 잠시 멈춰 자신이 달려왔던 길을 뒤돌아보며 기다린다. 너무 빠르게 달려와서 자신의 영혼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 채 잃어버리고 방황할까 봐 말이다.
이 글을 보고 우리의 인생과도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만 보고 줄곧 내달리다 보면, 빨리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 '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가장 많이 마주해야 할 평생 친구인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꾸만 뒤를 돌아봐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지금 제가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제 앞을 지나고 있는 사람, 어지럽게 펼쳐진 수많은 길이 아니라 내 속도에 따라오고 있는 나 자신이겠구나 싶었죠.
못난 마음이 자꾸만 뺨을 저미고, 나뭇조각에라도 앉아 쉬어가고 싶을 때. 자꾸만 뒤를 돌아봐주세요. 몽골에서 제가 배웠던 건 그거 딱 하나였습니다. 내가 잘 따라오고 있나, 버겁지는 않나 자꾸만 뒤를 돌아봐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