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히, 분위기가 고요하고 편안하게
도피. 도망. 휴식. 여행.
수많은 이름을 붙여, 수없이 이곳으로 떠나왔습니다. 가족이 사는 고향도 아니고, 무언가를 맡겨둔 것도 아닌데 왜 자꾸만 이곳으로 떠나오는 걸까. 저 멀리 해외나 섬도 아닌, 애매하게 먼 이곳을 찾게 되는 걸까. 스스로도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삶이 조금 무거워질 때, 저도 모르게 ktx 어플을 열어 약속이나 한 듯 이곳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예매할 뿐이었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사로 향하고 있던 날이었어요. 오전 8시 즈음이었나, 지하철은 사람으로 가득했고, 발 디딜 곳을 겨우 찾아 한 줌 정도의 제 자리에서 멍하니 누군가의 뒤통수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밀려드는 일과 생각들. 문득 이 세상에서 제게 주어진 자리가 딱 이 한 줌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더 이상 앞으로 뒤로도 나아갈 수 없는 딱 이 한 줌. 그 순간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처음엔 딱, 그 한 줌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ktx 어플을 열어 금요일 저녁 기차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했죠. 그렇게 도피와 발버둥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제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부산도 서울과 다름없이 바쁘고, 사람도 많은 도시인데. 신기했어요. 왜 그리 부산 바다만 바라보면 유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특히 초여름에 광안리나 송정 바다 앞에 앉아, 책 한 권은 소품으로 두고 바다를 읽으면 일렁이던 마음도 잔잔해지더라고요. 이 글을 보는 분들도 마음속 한구석에 품고 사는 공간. 여행지. 책의 구절. 노래가 있으신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제겐 부산이 그렇거든요.
이곳은 제 방앗간, 신기커피라는 곳입니다. 누군가의 취향이 묻어난 공간을 좋아해요. 천장과 화장실까지도. 사장님의 손이 길게 뻗은 곳들. 그런 곳을 유난히 애정합니다. 광리단길이 생기면서, 이곳도 이젠 만인의 방앗간이 되어버렸지만요. 이곳에서 마셨던 모닝커피와 그 여유로운 분위기가 문득 생각이 나네요.
광안동 끝자락, 수영역 부근에 위치한 자그마한 골목.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조금만 벗어났을 뿐인데 사람이 덜한 곳. 혼자 쿠지라스토랑에서 아부라소바를 맛나게 먹고 구프레코드에서 강아지 뚜시와 힐링하는 코스. 이 두 곳은 두고두고 다시 한번 가보려고 합니다. 낮보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대, 그리고 저녁이 더 예뻤던 골목이었어요. 골목골목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 무작정 들어가 보는 것. 그게 혼여행의 묘미가 아닐까요.
영도 부근엔 유난히도 고양이가 많아요. 햇살에 몸을 맡긴 고양이. 몸을 낮춰 사람을 경계하는 고양이. 지붕에 앉아 더 좋은 자리를 찾는 고양이. 사람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는 고양이까지. 고양이도 이렇게 제각각인데 사람은 얼마나 다양할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곤 합니다. 생각은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요. 우리 모두가 제각각이라면, 같은 이 시간 속에서도 누군가는 여행을 하고, 일을 하고, 잠시 쉬어가고, 멈출 수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죠. 이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날 자전거를 타기도 했는데 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같은 길에서도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앉아서 경치를 즐기고,
누군가는 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또 누군가는 해안길을 따라 달리는데.
더 길고 넓은 인생에선
당연히 속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겠다.
내가 마음을 쏟을 곳은
내 에너지의 총량과 내 속도이구나.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걸 주네요. 자전거에서도, 바다에서도, 심지어는 고양이에게서도 배울게 참 많아요.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조금은 살만 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산 바다 중에 한 곳입니다. 노을이 참 예쁜 다대포 해수욕장. 무작정 ktx 기차표를 끊었던 날, 가장 먼저 찾아온 곳이기도 해요. 이 바다가 참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다'는 말은 때론 나와 우리를 살게 하기도 하는 말이네요. 보고 싶은 대상을 세상 곳곳에 많이 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 잘 보이게 꺼내 두어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소개할게요. 주책공사라는 서점과 함께 부산에서 책이 읽고 싶어질 때 찾는 곳입니다. 이름처럼 그 근처 골목을 돌아보다가 우연하게 방문하게 되었어요. 햇살이 가득한 시간에 비타민D 가득 머금으며 책 한 권 읽으시는 걸 슬쩍 권해봅니다.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어요.
글을 쓰다 보니 제가 왜 부산을 좋아하는지 얼핏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저를 살게 하는 것들이 곳곳에 많이 심어져 있어요. 보고 싶었던 바다, 햇살 가득한 책방, 늘어져 있는 고양이, 취향을 갖고 싶게 하는 공간들. 그 한 줌에서 이따금씩 벗어나 보는 맛을 알아버려, 이렇게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줌이 한 바닥, 한 세계가 되어 버리는 그날까지.
저는 언제나 그랬듯
잔잔히. 부단히. 다녀보렵니다.
그나저나 올해도
초여름 부산을 놓치지 않아 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