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시간들
밤이 되면 자기 싫다는 망설임이 기승을 부린다. 그 망설임은 떼어내려고 몸을 부르르 떨어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찰싹 나에게 달라붙는다. 내 마음속 본능 세포를 때리고, 발로 차고 욕을 해봐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 '질린다 진짜.' '응, 나도.' 이런 변함없는 패턴의 1분짜리 연극을 몇 천일 동안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 나 계속 이렇게 살면 인생 망할 텐데. 아니, 이미 망했지?
내 핸드폰을 갖게 된 나이가 10살 무렵. 그리고 4년이 지나 중1이 된 나는 나를 머릿속으로 괴롭히는 법을 배웠고, 나에게 정이 털리는 법도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퍽이나 어렸던 나는 자괴감을 밤에 알게 됐다.
낮에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 보관함에 핸드폰을 강제로 수납하고 학교생활을 해야 했고, 저녁에는 학원에 가야 했다. 비로소 밤에야 자유 시간을 갖게 된 나는 핸드폰을 그렇게도 눈 뒤집혀서 봤더랬다. 대체 뭘 했길래 그랬지. 기억도 안 나는 무언가에 혼이 빨려 정신 놓고 밤을 새운 적이 빼곡하다. 현재에도 기억나고 인상에 남은 것들은 다 낮에 벌어진 일인데, 당시의 정신과 관심은 모조리 밤에 집중됐었다.
금세 휘발되는 유튜브 영상들, 뒤돌면 기억에나 남을까 싶은 오락소설과 웹툰들. 가십 뉴스들과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는 커뮤니티의 글들. 당장의 지루함을 채워줄 놀잇거리는 많았다. 아마 내가 평생을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본다고 해도 마르지 않을 샘물이 거기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으면 바깥의 소리는 뭉개져서 잘 들리지 않는다. 일부러 무시하면 더더욱.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항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자괴감을 빨리 배웠고, 그래서 죄책감을 지우는 법도 알았다. 그러나 한없이 잔소리를 하고 협박을 하고 거래를 하고 애원도 해보고 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물고 빨고 지랄도 해봤지만 나는 변하지 않았다. 이런 나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자괴감에 깊게 짓눌린다고 해도 오히려 그게 방만의 윤활제가 되어줬으니까.
어제의 내 약속을 안 지켜서 마음이 무거우면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죄책감을 갖는다 -> 가슴이 아프다 -> 난 지금 벌을 받는구나...->... 오 그럼 벌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지) 유튜브를 봤고, 오늘의 약속이 있으면 그것을 깨트릴 때의 해방감이 (매일을 해방되어 있어도 해방되고 싶은 모순적인 마음이랄까.) 좋아서 소설을 봤다.
물론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하나도 지지 않고.
그 후로는 뻔한 이야기다.
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가 나쁘진 않지 않나?
한국에서 공부해도 성적이 안 나오는 머리 나쁜 애들이 얼마나 될까. 다 시간을 때려 부어서 공부를 하니까 성적도 잘 나오는 거지. 간단한 이치다.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공부 시간을 많이 가져서 그런 거고, 공부 못하는 애들은 공부 시간을 적게 가져서 그런 거다. 머리의 좋고 나쁨은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별로 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이야기.
그러니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시험 점수는 거짓말을 해주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성적에 맞춰 그에 맞는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중학생 때 이후로 전혀 크지 않았는데 나이만 차는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는 뻔한 말이다.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핸드폰을 놓고 자려고 하는 시간이 아까워. 잠깐 씻는 시간도 아까워. 잠깐 노트북 켜서 스트레칭하는 시간도 아까워. 그 시간에 핸드폰으로 봤던 유튜브 또 보고, SNS 또 돌고, 소설도 볼 수 있는데...."
10년을 넘게 내 생각에 끊임없이 태클을 걸던 한 줌의 양심이 이제는 심심찮게 태업을 하던 날 중 하나였다. 만담처럼 맞받아쳐주는 존재가 없으니 어색해진 나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 핸드폰을 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난 너무 아까워해. 그렇게 느껴. 사실 대상이 반대여야 하는데. 내가 하는 게 뭐라고 낭비하는 시간을 귀중하게 여기지. "
꽤 이성적이다,라고 느꼈다. 속으로 말을 내뱉으면서도.
'저 아까운 시간들이 다 내가 해야 할 시간이고, 나한테 더 도움이 되는 시간들인데. 이건 아까운 게 아니야. 그럴 시간이 있는 거에 감사해야 하는 거야. 귀중하게 봐야 하는 시간이라고.'
이건 말하면서도 참 정석적인 입바른 얘기라고 느끼긴 했다. 잠시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친척어른이 나한테 빙의라도 한 줄 알았다.
며칠이 지나 다시 이 생각의 흐름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알게 됐다.
아깝다고 말한 시간도, 그 대신으로 원한 시간도, 단지 그냥 내 착각일 뿐이란 걸. 이건 아까운 게 아니라 병적인 의존이고 집착인 거지.
아깝다는 가치가 들어갈 여지도 없는 그러한 것들.
이 글의 끝도, 나도 희망 어린 미래는 아직 없다. 떡밥이 뿌려지지 않았으니 회수할 것도 없다.
나는 소설의 떡밥 없는 반전은 허무하고 허상인 게 강하게 느껴져 싫어한다. 새벽에 이불을 덮고 그런 소설을 보고는 은연중에 내 글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처럼, 진짜처럼 정말로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글을 읽는 잠깐이라도.
아까운 것들이 아깝지 않다는 걸 알아도 내 일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전에 그래왔던 것처럼.
뭐... 그래도 알긴 알았으니 그때보다 하루 정도는 컸겠지.